충남 삽교에 있는 소란서점에 갈 예정이었다. 당일 새벽 아버지가 응급실에 실려 갔다는 소식을 듣고 일정을 취소했다. 날이 밝도록 아버지는 의식이 없고 검사에 검사가 이어졌다. 응급실에 멍하니 앉아 있다가 소란서점 김소정 대표가 보낸 메시지를 보고 와락 눈물이 났다. “작가님을 책의 길로 인도한 아버님의 쾌유를 빕니다”라는 내용이었다.
필자가 쓴 ‘동네 책방 생존 탐구’의 서문에 “매달 ‘소년 중앙’과 ‘어깨동무’를 사 들고 오신 나의 아버지. 당신이 어린 딸을 책 읽는 길로 인도해주셨습니다. 고맙습니다”라고 써뒀다. 그 글을 떠올린 순간, 늙고 병들어 침상에 누운 아버지와 얽힌 먼 기억이 소환됐다.
초등학교 시절, 아버지는 당시 인기가 높던 어린이 잡지 ‘소년 중앙’과 ‘어깨동무’를 사왔다. 동생과 나는 잡지에 연재되던 길창덕의 ‘꺼벙이’나 이상무의 ‘비둘기 합창’ 같은 만화를 읽는 재미에 푹 빠져 있었다. ‘네스호의 진실’ 같은 미스터리와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동화를 처음 읽은 것도 이 잡지들을 통해서였다. 매달 출간되는 잡지를 기다려 읽는 즐거움은 아버지가 준 선물이었다. 조금 더 자라서는 아버지가 좋아하던 잡지 ‘산’을 따라 읽었다. 전문 산악 잡지였지만 에세이가 훌륭했다. 거대한 자연 앞에 선 인간의 이야기는 문학적 감수성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아버지는 이 잡지들을 동네 책방에서 사서 집으로 들고오셨을 테다. 수십년 전만 해도 버스 정류장 앞에 레코드점과 나란히 작은 서점 하나는 늘 있었으니까.
책 읽기는 텍스트만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책을 둘러싼 여러 경험과 만나야 꽃을 피운다. 친구를 따라 우연히 갔던 서점 혹은 내 돈을 내고 산 첫 책의 특별함이 있어야 책 읽는 사람이 태어난다. 나에게 이 마법을 부린 사람은 아버지였다. 아버지가 건네준 어린이 잡지가 인생의 첫 텍스트였다. 내 기억 속 아버지는 결코 다정하거나 친절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외곬에 고집이 센 분이었다. 원망은 많이 했지만, 아버지가 꼬박꼬박 사온 잡지에 넣어둔 부정(父情)은 읽지 못했다.
새해가 돼 계획을 세우고 있다면 한 가지를 추가해보면 좋겠다. 정기적으로 서점에 방문하기다. 막연하게 올해는 책 좀 읽겠다는 생각보다 훨씬 구체적인 방법이다. 지도앱에서 사는 곳 인근에 있는 서점을 검색해보면 쉽게 찾을 수 있다. 요즘 서점은 카페를 겸하거나, 가볼 만한 지역 명소 인근에 있어 나들이 삼아도 좋다.
특히 어린이와 함께 동네 책방에 가는 일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서점에서 어린이가 읽을 만한 책을 추천받을 수도 있고, 즉석에서 그림책 낭독을 들을 수도 있다. 예컨대 대전에 있는 그림책방 ‘넉 점 반’에 가면 김영미 대표가 어른이건 어린이건 독자에게 맞춤한 그림책을 골라 직접 읽어준다. 또는 책방에서 이뤄지는 다양한 북클럽에 참여해도 좋다. 이렇게 책방을 즐기다 보면 책과 친해지고 소중한 기억이 생겨난다. 훗날 책방을 통해 부모를 추억하는 일은 이렇게 시작된다.
한미화 출판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