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소금] 착한 일을 맘껏 자랑할 용기

입력 2025-01-11 00:37

한국인 대부분이 그렇듯, 자랑에 취약하다. 비슷한 맥락으로 상대 칭찬에도 곧잘 머쓱해 한다. 달라진 머리 스타일이 잘 어울린다는 식의 일상 대화부터 업무 성과를 칭찬하는 말엔 부끄러운 표정이 앞선다. 모르긴 몰라도 공감하는 독자가 많을 것이다. 잘한다는 말에 “아이고, 아니에요”라며 제대로 수용하지 못하는 것이 한국인 특유의 말버릇이라는 글은 어디선가 본 적 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기분이 참 좋다”는 모범 답변을 알고 있지만, 여전히 많은 상황에서 겸연쩍다는 표현이 먼저 튀어나온다.

이런 나도 익명에 기대 맘껏 자랑해 본 적이 있다. 2년째 이어진 아들의 크리스마스 선행이다. 신분 노출 위험이 없고 내 공치사가 아닌 자식 일이라 그럴 수 있지 싶다. 그런 생색을 온라인 커뮤니티에 남길 수 있었던 진짜 용기는 누군가가 비슷한 일을 따라 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나왔다.

첫 글은 2023년 크리스마스 즈음이었다. 이제 막 산타의 정체를 알게 된 아들에게 몰래 선물할 일이 없어졌다고 느꼈다. 아이에게 무엇을 갖고 싶냐고 물었다. 그러나 외동에겐 별다른 결핍이 없었다. 슬쩍 ‘선물을 못 받는 친구들이 있다는데…’라며 보육원 얘기를 꺼냈다. 기특하게도 자기 선물을 다른 친구에게 줘도 괜찮다고 했다. 집에서 멀지 않은 한 기독교재단 보육원에 연락해 이런 이야기를 전했더니 곧 초등학생이 될 남자아이 한 명을 연결해줬다.

그 친구가 사고 싶은 물건을 들고 보육원에 갈 계획은 독감 확진으로 이뤄지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받고 싶은 선물을 들고 환하게 웃는 꼬맹이 모습을 사진으로 전달받을 수 있었다. 그 따뜻함을 동네방네 떠들고 싶었다. 지인과 소통하는 인스타그램에 올리자니 민망해 차선으로 택한 것이 동네 맘카페였다. 100명 남짓한 내 팔로워보다는 회원 수만 명이 보는 그 공간이 더 파급력이 있겠다 싶었다.

무심한 성격 탓에 그 일을 까맣게 잊고 살았다. 바쁘단 핑계로 아이 선물을 준비하지 못한 채 크리스마스이브를 맞았다. 함께 저녁을 먹으며 ‘이런 날에도 가족과 함께 보내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가족이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선물 아니겠냐’는 꼰대 같은 소리를 했던 거로 기억한다. 아이가 ‘그런 분들에게 무언가를 드리면 좋겠다’는 취지로 말하는 순간, 한 해 전 크리스마스 선물을 기부했던 기억이 퍼뜩 떠올랐다.

밤새 일하는 경비 아저씨에게 맛있는 음식을 보내자고 결론 내고, 배달 앱으로 닭강정 여러 상자를 시켰다. 기분 내는 김에 배달기사에게도 한 상자 선물했다. 특별한 날 미리 선물을 준비하지 못한 무관심한 엄마 같아 어딘가 불편한 마음이 말끔히 사라졌다. 나는 또 맘카페에 들어가 우리의 선행을 떠들었고, 내 글에 달린 칭찬 댓글을 아이에게 보여줬다.

기자로서 미담 전하는 것을 좋아한다. 특히 소소한 선행을 발굴하고, 묻힐 뻔한 따뜻한 마음이 세상에 알려질 때 기분이 더 좋다. 그런 기사엔 ‘별일도 아닌데 기자가 호들갑 떤다’거나 ‘조용히 선행하는 게 더 낫다’ 식의 반응이 종종 달린다. 누군가 그렇게 말하든 말든 새해엔 더 많은 사람이 자신의 착한 일을 더 맘껏 뽐내길 꿈꾼다. 언젠가부터 ‘자랑 공간’으로 전락한 인스타그램에도 선행 자랑이 넘쳐났으면 한다. 명품가방 로고나 자동차 핸들에 박힌 브랜드 엠블럼을 은근히 보여주거나, 영어 원서를 읽거나 좋은 대학 이름이 적힌 ‘과잠’을 걸친 자녀가 카메라에 우연히 담긴 척 올리는 것 같아도 상관없다.

허세 섞인 자랑처럼 비칠지라도 누군가에게 행한 착한 일을 세상에 퍼트리는 일에 주춤하지 않길 바란다. ‘너는 구제할 때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마 6:3)’는 말씀이 있다. 하지만 SNS의 순기능을 기대하며 왼손이 한 일을 오른손 정도는 알게 해도 되지 않을까. 우리의 아주 작은 선행이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한 줄기 빛, 부패한 세상을 깨끗하게 하는 한 줌의 소금이 될 수 있다면 말이다.

신은정 미션탐사부 차장 se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