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프로퓨모 장관 스캔들 엘리트 지도층 신뢰 무너뜨려
법원·언론 권위와 신뢰 추락 사회 전체가 분열의 비용 치러
계엄으로 드러난 지도층 민낯 대가는 국민이 부담할 수밖에
법원·언론 권위와 신뢰 추락 사회 전체가 분열의 비용 치러
계엄으로 드러난 지도층 민낯 대가는 국민이 부담할 수밖에
프로퓨모 사건은 1960년대 초반 영국 사회를 근본부터 뒤흔든 핵폭탄급 스캔들이었다. 존 프로퓨모는 해로우스쿨과 옥스퍼드대학을 나온 특권층의 일원이었으며, 2차대전에 참전해 대영제국 훈장도 받은 전쟁영웅이었다. 게다가 1940년 25세에 최연소 하원의원이 된 정치 신동이었다. 많은 사람은 프로퓨모 의원이 장래 영국의 총리가 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랬던 그가 전쟁상(국방부 장관)으로 재직 중 19세 여성 크리스틴 킬러와 깊은 관계였다는 것이 밝혀진 것은 그의 나이 48세, 1963년 3월이었다.
당시 언론이 암묵적으로 지켜온 불문율은 이런 사건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킬러가 주영 러시아 대사관의 해군무관이자 정보요원이었던 이바노프와도 깊은 관계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이 사건은 국가 기밀이 누설됐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 대형 스파이 사건으로 발전했다. 그 시기가 베를린 장벽이 세워지고, 쿠바에서 미사일 위기가 일어났던 동서 냉전의 한복판이던 때였음을 기억해야 한다.
프로퓨모는 성추문 자체보다 의회에서 킬러와의 관계에 관해 거짓말을 함으로써 장관직에서 물러났을 뿐 아니라 의원직도 포기, 결국 영원히 정계에서 은퇴했다. 당시 해럴드 맥밀란이 이끌던 보수당 정부는 1963년 가을 맥밀란의 총리직 사임과 1964년 총선 패배로 엄중한 정치적 책임을 졌다.
한편 최고의 판사로 불리던 데닝 경이 이끌던 조사위원회는 1963년 9월 공개한 조사 보고서를 통해 성추문에도 불구하고 국가 기밀이 유출된 증거는 찾을 수 없다고 발표했다. 그렇지만 이 보고서가 부실하고 선정적이며 부적절했다는 게 밝혀진 것은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서였다. 킬러는 다른 사안으로 수감됐으며, 석방되고 나서도 언론과 사회의 모진 냉대, 질시 속에서 고통스럽게 생을 이어갔다. 프로퓨모가 정계 은퇴 후 평생 무료 봉사활동을 하면서 높은 등급의 대영제국 훈장을 받는 등 명예를 회복한 것과 대비된다.
영국 국민의 충격은 컸다. 당시 영국 국민이 소위 엘리트 인사를 보는 시각은 그들이 그만한 자격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우리를 잘 이끌 것이라는 믿음이었다. 즉 훌륭한 교육을 받은 자들이 갖고 있는 명석함과 현명함, 책임감과 헌신으로 나라와 국민을 좋은 방향으로 이끌 것이라는 기본적인 신뢰가 사회 저변에 깔려 있었고, 이것이 영국을 이끄는 저력이라고 생각했다. 이 모든 믿음이 프로퓨모로 인해 산산이 부서졌다.
엘리트 정치인 프로퓨모는 도덕성도 정직함도 갖지 못한 사람으로 밝혀졌고, 데닝 판사의 조사도 사건을 덮으려고만 한다는 불신을 받았다. 뉴스를 선정하고 해석하는 독점적 권한을 갖고 있는 언론과 방송이 그 힘을 공정과 상식의 기준에 따라 엄격히 행사하고 있으리라는 믿음도 깨졌다. 권위의 추락과 신뢰의 상실이 가져오는 충격은 엄청났고, 영국 사회는 불신과 분열의 비용을 계속 치를 수밖에 없으리라는 자조와 비탄에서 헤어나기 어려웠다.
이제 우리 내부로 눈을 돌려보자.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한 지 한 달이 훌쩍 지났다. 지난 한 달여 동안 우리가 눈으로 확인한 것은 국가를 운영하던 소위 엘리트 지도층의 민낯이다. 비상계엄 선포 당일 국사를 논하는 최고 책임과 권한을 갖고 있는 국무위원들은 헌법 위배 가능성이 매우 높은 비상계엄 조치에 대해 어느 누구도 몸을 던져 막지 않았다. 사전에 비상계엄 조치 계획을 전달받은 육군 수뇌부는 어느 누구도 이것이 40여년 만에 또다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후퇴시키고 군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폭거라고 반대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불법적인 명령에 적극적으로 동조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일부 정치인들은 이것이 민주공화국의 기본 가치에 도전하는, 선을 넘은 행위임을 인정하지 않고 지금도 여전히 정략적으로 해석하고 옹호하기에 바쁘다.
국가기관의 권위가 추락하고 신뢰가 깨지면 모든 비용은 사회와 국민이 부담하게 된다. 헌법과 법률을 존중하지 않고, 거짓뉴스를 생산하고 퍼뜨리면서 거짓 선동을 하는 행위는 불신을 조장하고 사회를 정신적 아노미 상태로 몰고 간다. 국제사회는 지금 한국의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해 있으며, 그 끝이 어디로 향하는지 예리하고 냉정하게 주시하고 있다. 우리는 시험대 위에 올라 있음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된다.
김흥종 고려대 국제대학원 특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