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색 가죽 재킷을 입은 백발의 중년 남성이 홀로 무대 위로 올라와 “오늘 입은 재킷이 어떠냐”고 묻는다. 이어 그래픽카드 십수장을 이어붙인 방패를 들더니 마블 영화 ‘캡틴아메리카’를 흉내 내며 관중과 함께 박장대소한다. 세계 2위 시가총액 3조7000억 달러(약 5400조원)를 자랑하는 빅테크 엔비디아의 수장 젠슨 황 최고경영자(CEO)가 펼친 미래상에 미국 라스베이거스 전체가 열광했다.
2017년 이후 8년 만에 세계 최대 가전·정보기술(IT) 전시회 ‘CES 2025’를 찾은 황 CEO의 기조연설 무대는 유명 가수의 콘서트나 인기 스포츠 경기를 방불케 했다. 연설 예정 시각으로부터 1시간20분 전인 6일 오후 5시(현지시간) 이미 만달레이베이는 그를 만나려는 인파로 가득했다. 19만㎡가 넘는 거대한 호텔조차 수많은 관중을 수용하지 못해 대기줄이 바깥까지 늘어설 정도였다. 보안요원이 “입장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고 연신 외쳤지만 사람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수천명 뒤에 줄을 섰다. 스웨덴에서 온 토마스 베니크는 “개인적으로 황 CEO의 굉장한 팬”이라며 “유튜브로도 그의 연설을 들을 수 있지만, 꼭 그를 직접 보고 싶어 이곳을 찾았다”고 말했다.
연설 장소 미켈롭 울트라 아레나의 좌석은 빠짐없이 빼곡하게 채워졌다. 본래 미국프로농구(NBA)나 종합격투기(UFC) 경기장으로 사용되는 아레나의 최대 수용 인원(1만2000석)이 가득 차고 나서야 이날의 주인공이 모습을 드러냈다.
황 CEO는 로봇 시대의 개막을 선언하며 포문을 열었다. 황 CEO는 “우리는 물리적 인공지능(AI)을 민주화하고 모든 개발자가 일반적인 로봇공학을 사용할 수 있도록 코스모스를 만들었다”며 ‘피지컬(물리적) AI’를 소개했다. 이 AI는 로봇처럼 가상세계가 아닌 현실세계에서 활동해야 하는 물체를 움직이기 위한 중추 시스템으로, 주변 사물과 변화하는 상황을 스스로 인식하고 행동하는 인간형 로봇 ‘휴머노이드’ 개발에 필수적이다. 황 CEO는 “로봇을 위한 챗GPT의 모멘트가 다가오고 있다”며 “대규모 언어모델(LLM)과 마찬가지로 코스모스는 로봇과 자율주행차의 개발을 발전시키는 데 기본이 될 것”이라고 자신했다.
황 CEO는 초소형 개인용 슈퍼컴퓨터 ‘프로젝트 디지트’의 상용화 계획도 밝혔다. 엔비디아가 개발한 이 슈퍼컴퓨터는 엔비디아의 최신 중앙처리장치(CPU) ‘그레이스’와 그래픽처리장치(GPU) ‘블랙웰’을 결합한 제품인 GB10을 모체로 개발됐다.
이 슈퍼컴퓨터는 기상청이나 대학 연구실에서 사용하는 거대한 컴퓨터와 달리 크기가 손바닥만 하다. 그러나 성능은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다. 이 슈퍼컴퓨터가 처리할 수 있는 LLM 파라미터(정보 단위)만 2000억개에 달한다. 2개의 슈퍼컴퓨터를 ‘엔비디아 커넥트X’ 네트워크로 연결하면 최대 처리 가능한 파라미터가 4050억개로 늘어난다.
가격도 매력적이다. 기존 슈퍼컴퓨터는 판매가가 최소 수백억원에 달해 개인이 엄두조차 내기 어려웠지만, 엔비디아는 최신형 슈퍼컴퓨터를 오는 5월 3000달러에 출시할 예정이다. 400만원 남짓한 돈으로 개인이 서재에 슈퍼컴퓨터를 설치할 수 있는 시대가 도래하는 것이다. 황 CEO는 “AI가 모든 산업의 시대적 중심을 차지하는 변화에 대비하기 위해 엔비디아는 프로젝트 디지트를 개발했다”며 “전 세계 모든 데이터 과학자와 AI 연구원, 대학생의 책상에 슈퍼컴퓨터를 설치해 그들이 AI 시대를 만들어나갈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신작 공개는 이게 전부가 아니었다. 황 CEO는 차세대 게임용 GPU인 ‘지포스 RTX 50’ 시리즈도 최초로 공개했다. 지포스는 데스크톱·노트북 등 일반 컴퓨터에 탑재되는 GPU다. RTX 50 시리즈는 직전 세대와 비교해 성능을 유지하거나 끌어올리면서도 가격은 획기적으로 낮추는 데 성공했다. 최신 AI 칩 아키텍처 블랙웰을 기반으로 하는 RTX 5090은 직전 세대 대비 연산 능력이 최대 2배 올랐다. 시리즈 가운데 가장 낮은 성능을 보이는 보급형 GPU RTX 5070은 직전 세대 제품군의 최상위 모델 RTX 4090보다 더 나은 성능을 보이면서도 가격은 3분의 1 수준인 549달러로 내렸다.
라스베이거스=글·사진 김지훈 기자 german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