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년 만에 퇴장’ 트뤼도… 진보 아이콘서 트럼프 놀림감으로

입력 2025-01-08 00:00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가 6일(현지시간) 오타와 총리관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후임자가 정해지는 대로 자유당 대표와 총리직에서 물러나겠다는 뜻을 밝히고 있다. AP연합뉴스

쥐스탱 트뤼도(53) 캐나다 총리가 9년여 만에 물러난다. 트뤼도 총리의 지지율은 고물가와 이민 정책 실패 등으로 20%대 초반까지 떨어진 상태였다. 총선을 1년도 남기지 않은 시점에 당 안팎에서 사퇴 압박이 이어졌고 결국 더 이상 못 버티게 됐다. 총리 취임 당시 44세라는 젊은 나이와 잘생긴 외모로 전 세계 진보 정치의 아이콘으로 주목받았던 트뤼도의 초라한 퇴장이다.

트뤼도는 6일(현지시간) 오타와 총리 관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캐나다는 다음 선거에서 진정한 선택을 받을 자격이 있다. 당내에서 싸울 때 내가 최선의 선택이 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며 집권 자유당이 새 대표를 선출하는 대로 당대표와 총리직에서 물러나겠다고 밝혔다. 캐나다는 의원내각제 국가로 집권당 대표가 총리를 맡는다.

트뤼도는 총독에게 요청해 의회 개회를 이달 27일에서 3월 24일로 연기했다고 밝혔다. 중도 좌파 성향의 자유당은 이 기간에 새 대표를 선출할 전망이다. 차기 총리로는 트뤼도와 갈등하다 사임한 크리스티아 프릴랜드 전 부총리 겸 재무장관, 마크 카니 전 캐나다중앙은행 총재, 멜라니 졸리 외무장관 등이 거론된다. 트뤼도는 캐나다 정치 명문가 출신이다. 17년 동안 총리를 지낸 아버지 피에르 트뤼도의 후광을 업고 2013년 자유당 대표가 된 트뤼도는 2015년 총선을 승리로 이끌며 총리에 취임했다. 취임 당시 ‘캐나다의 오바마’로 불린 그는 내각의 남녀 성비를 1대 1로 구성하는 등 진보주의를 실천하며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폭등한 물가가 그의 발목을 잡았다. 이민·유학생을 대거 받아들이면서 주택과 일자리 문제도 심각해져 국민 불만이 누적됐다. 여론조사 업체 앵거스리드에 따르면 취임 초 65%에 달했던 트뤼도의 지지율은 지난달 22%까지 떨어졌다.

지난해 6월 보궐선거 패배를 기점으로 자유당 내에서 트뤼도 사퇴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다 경기부양책을 두고 트뤼도와 충돌하던 프릴랜드 부총리가 지난달 전격 사퇴한 것이 치명타가 됐다. 이후 당내 주요 계파들이 트뤼도에게 공개적으로 반기를 들고 나섰다.

자유당과 정책 연합을 맺어 왔던 제3야당 신민주당도 트뤼도가 사퇴하지 않으면 이달 말 내각 불신임안을 제출하겠다고 압박했다. 자유당은 과반 의석을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에 신민주당·퀘백 블록이 제1야당 보수당과 연합해 내각을 불신임하면 조기 총선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트뤼도는 대외적으로도 놀림감으로 전락했다. 그는 지난해 11월 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의 관세 폭탄 위협을 무마하기 위해 플로리다주 마러라고 리조트까지 찾아갔지만 “미국의 51번째 주가 되는 게 어떠냐”는 모욕적인 말만 들었다. 트럼프는 트뤼도를 ‘주지사’로 부르며 조롱했다. 트럼프는 트뤼도가 사임 의사를 밝힌 이날도 트루스소셜에서 “캐나다의 많은 사람은 (미국의) 51번째 주가 되는 것을 매우 좋아한다. 캐나다가 미국과 합병한다면 관세는 사라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캐나다 CBC방송은 “트뤼도 퇴진은 보수당의 우세와 자유당의 고전이 트뤼도의 존재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며 “자유당은 이제 무엇을 어떻게 하고 싶은지 빨리 결정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이현 기자 2hyu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