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 29일 무안 제주항공 참사가 발생한 날 저녁 서울 여의도 한강 유람선에서 불꽃쇼가 펼쳐지자 인터넷에선 “온 나라가 슬픔에 잠겼는데 불꽃놀이라니, 공감 능력 제로”라며 성토하는 의견이 쏟아졌다. 행사를 강행한 현대해양레저는 결국 서울시로부터 6개월간 유람선 운항 금지라는 행정처분을 받았는데 이를 두고 다시 논란이 불거졌다. “참사는 슬프지만 불꽃놀이를 했다고 6개월 영업정지라니, 과하다”라거나 “유람선 직원들 생계는 누가 책임지느냐”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정작 서울광장에서 운영되고 있는 스케이트장은 왜 중단하지 않느냐며 형평성에 어긋난다는 지적도 이어졌다.
연말 가수들의 공연에서도 비슷한 일이 반복됐다. 국가 애도 기간 임영웅과 성시경이 예정된 콘서트를 강행하자 인터넷 곳곳에서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조용필, 이승환 등은 공연을 취소했는데 당신들은 슬프지도 않느냐”는 지적과 “큰 공연을 취소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옹호가 엇갈렸다. 더 나아가 희생자를 추모하며 ‘R.I.P.(Rest In Peace)’라는 관용어구를 썼다가 “성의 없다”는 비판까지 받는 경우도 있었다. 추모의 방식을 두고 인터넷 전체가 서슬 퍼런 감시의 눈초리로 가득찬 느낌이었다.
인터넷 시대의 최대 장점 중 하나였던 ‘공감의 힘’이 어느새 ‘강요의 힘’이 됐다는 우려가 나온다. 공감은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고 연대감을 형성하는 중요한 도덕적 감정인데 그게 과열된 나머지 불공정과 비효율을 초래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폴 블룸 예일대 교수는 그의 저서 ‘공감의 배신’에서 공감이 우리의 도덕적 판단을 왜곡한다고 주장한다. 공감은 특정인이나 특정 사건에만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사회적 자원을 불균형적으로 배분하고, 나아가 전체적인 시야를 가린다고 단언한다.
그는 이를 스포트라이트에 비유한다. 공감은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은 환히 비추지만 그 밖에 있는 사람들은 여전히 고통의 어둠 속에 남겨둔다. 2012년 미국 코네티컷주 샌디훅 초등학교 총기 난사 사건이 대표적이다. 20명의 어린아이와 6명의 교직원이 목숨을 잃자 전 미국에서 엄청난 관심과 지원이 쏟아졌다. 하지만 같은 해 시카고에서 더 많은 아이가 총격으로 희생됐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공감은 또 단기적으로는 우리의 마음을 울릴지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비효율적일 수 있다. 샌디훅 사건 당시 미국 각지에서 보낸 선물과 장난감을 보관하기 위해 수백명의 자원봉사자가 동원됐고, 결국 뉴타운 공무원들이 “제발 그만 보내 달라”고 호소할 정도였다.
블룸 교수는 무분별한 공감 대신 보편적 연민과 이성적 판단이 더 나은 세상을 만든다고 강조한다. 참사 당일 한강 유람선의 불꽃쇼가 적절했는지를 논의하면서도 이로 인해 생계를 잃게 될 직원들의 상황까지 고려하는 게 더 성숙한 태도라는 것이다.
타인의 슬픔을 나누는 것은 인간의 도리다. 하지만 슬픔을 함께하는 방식이나 그 무게까지 강요해선 안 된다. 그건 자유를 억누르려는 비상계엄에 우리가 맞서는 것과 같은 이치 아니던가. 한 치의 빈 곳 없이 촘촘하게 엮인 인터넷 세상에서 우리는 공감의 시대를 살 수밖에 없다. 그러나 공감이 특정 대상을 향해 과도하게 집중되고 강요된다면 우리는 오히려 소외된 이들의 고통을 잊는 실수를 저지르게 된다. 이렇게 되면 공감은 우리를 더 나은 세상으로 이끄는 도구가 아니라 도덕적 혼란을 초래하는 함정이 된다. 진정한 연민은 특정인을 향한 스포트라이트가 아니라 전체를 비추는 조명과 같다. 공감의 힘은 그것이 강요되지 않을 때 가장 빛난다.
김상기 선임기자 kitti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