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이 나와 그 자매를 이어주고 싶어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지금 생각해보면 자매는 믿음이 신실했지만, 나는 믿음도 없고 살고 싶은대로 사는 형제 취급을 받았던 것 같다. 내가 자매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면 나의 재능이 크게 쓰일 것이라는 기대도 하셨을 것이다.
도대체 이 자매가 나를 무엇을 보고 사모했다고 했는지 사실 이해가 가지 않았다. 당시 22살이던 나는 만약 교제할 사람을 만나게 되면 결혼할 사람을 만나야겠다고 생각했었다. 마냥 순수하고 어렸다. “목사님, 잘 되든 잘못되든 책임지셔야 합니다.”
자매의 연락처를 받아달라고 부탁한 지 일주일 만에 목사님은 번호를 주셨다. 전국적으로 비가 오고 추웠던 겨울 어느 날, 메모지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저 소개받은 최경주인데, 그래도 얼굴이라도 한번 봐야 하지 않을까요.” 자매와 만날 날을 잡았다. 1992년 말이었다.
나는 운동에 전념하느라 공부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내가 될 사람은 나보다 똑똑하고 지혜로웠으면 했다. 나중에 생길 자녀에게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기를 바랐다. 대신 나는 운동으로 성공해서 가족을 굶게 하지는 않을 거라고 다짐했다.
그러다 보니 만남의 조건이 “우리 사귈래요”가 아니었다. 결혼이라는 틀 안에서 만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른 조건은 보지 않았다. 집안 배경과 환경은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결혼은 남자와 여자가 둘이 사는 거니 부차적인 조건은 눈에 보이지 않았다.
자매의 첫인상은 좋았다. 눈은 동글동글했고, 똑똑해 보였다. 저런 눈이면 뭐라도 해내겠다 싶었다. 키가 작은 건 둘째 문제였다. 사연이 있든 없든 상관없었다. 게다가 자매는 단국대 법대 2학년 재학 중이었다. 문제는 나였다. 직업도 없고 집안이 뛰어난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당시에는 골프로 밥 벌어 먹고사는 시대가 아니었기 때문에 상대방 부모님을 설득해야 했다.
정식으로 교제하기로 하면서 공식적으로 인사를 드리는 게 예의겠다 싶어 찾아뵐 날짜를 정했다. 그날이 다가왔다. 문득 할머니가 해주신 말이 떠올랐다. ‘남자는 밥상에 차려진 음식을 다 먹어야 사랑받는다.’ 나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식탁에 올라온 음식을 남김없이 다 먹었다. 부모님은 “아니, 이렇게 식성 좋은 사람은 처음 본다”며 매우 놀라셨다.
22살의 최경주는 단순히 공을 치는 사람이 아니었다. 살벌한 환경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눈에서 광채가 났다. 인상도 강했고 기도 세 보였다. 다부진 20대 청년이었다. 만나는 어른마다 “저놈은 뭐라도 할 놈”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럴 때마다 내 대답은 하나였다.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살았을 뿐’이라고.
정리=유경진 기자 yk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