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승욱 칼럼] 지금 당장 헌법을 바꾸자고?

입력 2025-01-08 00:50

아홉번 바꿔 수명 8년 불과해도
개헌 결코 쉽지 않은 정치현실

당위성 인정되고 지지 많아도
정파적 이익 우선하며 추진 못해

탄핵 정국 쏟아지는 개헌 주장
‘87년 체제’ 극복 방해만 될 뿐

개헌 주장이 쏟아진다. 12·3 비상계엄 사태를 겪으면서 ‘87년 체제’의 한계가 뚜렷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5년 단임 대통령제에 기반한 6공화국 헌정 질서는 불행한 대통령을 양산했다. 38년 동안 8명의 대통령 중 1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4명이 수감됐으며, 3명이 국회에서 탄핵소추돼 그중 1명이 파면됐다. 제왕적 대통령제를 바꾸지 않으면 불행한 역사가 반복될 것이라는 주장에 누구도 토를 달지 않는다. 대부분 여론조사에서는 개헌이 필요하다는 응답이 절반을 훌쩍 넘는다.

그러나 당위라고 반드시 실현되는 건 아니다. 개헌의 필요성을 힘줘 말해도 가능성은 희박한 게 우리 정치의 현실이다. 1948년 제헌헌법 이래 지금까지 개헌은 아홉 번 있었으니 헌법의 수명은 대략 8년이다. 하지만 그중 여섯 번은 독재자가 권력유지를 위해 저지른 헌법 유린이었다. 국민의 염원을 담은 것은 4·19혁명으로 만들어진 1960년 3차 개헌과 5·18민주화운동 및 6월항쟁의 결과물인 1987년 9차 개헌뿐이다. 헌법은 젊은이의 희생이 있어야만 바꿀 수 있었다. 정부 공식발표 사망자는 4·19 186명, 5·18 166명(실종 179명)이다. 우리에게 개헌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87년 체제를 담은 지금의 헌법은 급하게 만들어졌다. 6월항쟁에 굴복한 6·29선언 한달 만인 7월 31일 헌법 초안을 위한 8인 정치회담 첫 회의가 열렸다. 여기서 다시 한달 만인 8월 31일 합의안이 나왔고, 국회 의결(10월 12일)과 국민투표(10월 27일)를 거쳐 공포(10월 29일)까지 딱 4개월 걸렸다. 물론 신속이라고 모두 졸속은 아니다. 하지만 대통령을 국민이 직접 뽑고, 장기집권을 막는 것에만 집중해 다른 것을 깊게 생각하지 못했다. 유신헌법부터 이어진 대통령의 무소불위 권한을 줄이지 못했다. 강력한 대통령을 강력한 국회가 견제토록 하는 데 그쳤다. 대통령의 국회해산권은 폐지되고 국정감사가 부활했다. 대통령과 국회는 국민이 직접 선출한 이질적 권력이다. 87년 체제는 두 권력의 충돌을 상대에 대한 권한을 최대한 키워 제어하는 구조다. 정치력을 발휘한 합의보다 힘을 직접 사용하는 게 효과가 크다. 야당은 무리를 해서라도 대통령의 비리와 실정을 파헤쳤고, 대통령은 집권하자마자 여당을 장악하고 조종해 입법 권력에 맞섰다. 두번째 기회란 없는 대통령 단임제는 목숨을 건 싸움을 더욱 부추겼다.

그러니 수시로 개헌론이 등장했던 건 어쩌면 당연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내각제 개헌 공약을 포함해 여러 대통령이 개헌 논쟁에 직접 뛰어들었다. 개헌 주장 한번 안 한 정치 지도자를 찾기 어렵다. 하지만 늘 말뿐이었다. 통일헌법부터 내각제, 이원집정부제(분권형 개헌), 원포인트 개헌 같은 이론만 무성했다. ‘제왕적 대통령제의 한계’라며 정치력 부족이 아니라 구조적 문제라고 변명했다. 다음 대선에서 불리하면 개헌론으로 물타기에 나서고, 대권을 잡으면 권력에 취해 시치미 떼기를 반복했다. 극단적인 진영 싸움을 말리는 척하는 방편으로 개헌론을 꺼내기 일쑤였다.

지금의 개헌 주장도 그렇다. 헌법재판소의 윤석열 대통령 탄핵 심판 기간 중 개헌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고 나선 국민의힘 셈법은 뻔하다. 헌법 수호를 선서한 대통령이 헌법 가치를 스스로 훼손한 이유를 밝히고, 헌법에 명시된 권력 구조의 문제점을 찾아 고치라는 게 국민들이 개헌에 찬성하는 이유다. 그렇기에 지금 나오는 국민의힘의 주장은 진정성을 인정받을 수 없다. 더불어민주당이 지난해 4·10 총선 직후 대통령 4년 중임제 및 거부권 행사 제한을 골자로 한 개헌을 몰아부쳤던 것과 다를 게 없다. 당시 민주당은 ‘이재명 대통령 만들기’라는 정치공학적 계산속을 노골적으로 드러냈고, 김진표 국회의장을 중심으로 어렵게 진행됐던 개헌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대통령 임기 제한을 헌법 부칙에 담는 원포인트 개헌론을 펴며 ‘시간 단축’을 외치는 강성 지지자들의 목소리는 여전하다.

지금은 탄핵 정국이다. 개헌의 당위성을 인정하지만 지금 당장 개헌에 나서자는 주장은 온당치 않다. 개헌을 빌미 삼아 정파적 이익을 관철시키려 한다는 의혹을 불식시킬 수 없다. 그래서 꼭 필요한 개헌을 어렵게 한다. 87년 체제의 한계를 극복할 생각이 있다면 여야는 불필요한 논란을 일으키지 말고 21대 국회에서 폐기된 ‘개헌절차법’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고승욱 수석논설위원 swk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