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폰으로 신년 덕담하는
초연결사회… 조금 늦었지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초연결사회… 조금 늦었지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내 생일은 1월 2일이다. 이렇게 말하니 누군가 “우아, 참 기억하기 좋네요”라고 했는데, 정작 그 사람은 이듬해에 내 생일을 기억 못 했다(아니면 내게 뭔가 섭섭했는지, 다음 해 생일에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요컨대 생일이 새해 첫날 다음 날이라서 딱히 장점이 있는 건 아니다. 1월 2일 생일자로 47년을 지내보니 오히려 단점이 더 많다.
우선 학창 시절에는 한창 방학 중에 생일이 끼어 있어 잔치라는 걸 해본 적 없다. 이게 뭐 대수냐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당신이 거의 쉰 살 가까이 결혼하는데 배우자 부모님의 간청으로 구정에 결혼식을 올린다고 생각해 보시길. 약 30년간 여기저기 축의금을 잔뜩 뿌렸는데, 본인 차례가 되자 법정 스님도 아닌데 무소유를 실천하며 인생사 공수래공수거라는 것을 절감해야 한다.
어린 시절 나는 친구들에게 늘 생일 선물을 건넸지만 돌려받는 것은 새해의 차가운 공기밖에 없었던, 요컨대 ‘아낌없이 주는 나무’의 의인화된 존재 그 자체였다.
물론 솔로몬의 말처럼 “이 또한 다 지나갔다”. 그러니 추억이 됐고, 아까울 것도 없다. 아쉬운 점은 내 선물을 받았던 녀석들과 하나같이 연락이 안 된다는 사실뿐이다.
그러니 굳이 덧붙이자면 마흔여덟 살의 내가 십대의 나에게 해줄 수 있는 조언은 “그냥 싼 거 사줘. 허세 부리지 말고” 정도일 뿐이라는 것(쓰면 쓸수록 옹색해 보이지만 그건 내 사정이고…). 그럼에도 펜을 든 이유는 1월 2일 생일자는 어른이 돼서도 여전히 난감하다는 점 때문이다.
초연결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은 안부 인사에 대한 압박감을 느낀다. 조선시대처럼 서신을 쓰거나 지난 세기처럼 전화를 걸어야만 인사를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스마트폰을 쥐고 메신저 앱에 손가락만 몇 번 토닥거리면 끝난다. 너무 간단하다.
심지어 대화를 끝내고 싶을 땐 예의를 지키면서 거리를 두는 사회적 약속 행위인 ‘이모티콘 전송’만 하면 된다. 그러니 연말이 되면 관계 단절의 우려를 느끼는 이들은 서로 덕담을 장구하게 주고받는다.
한국인은 3.6단계만 거치면 생면부지의 인물인 대통령에까지 연락이 닿을 만큼 촘촘한 연결사회를 살고 있다. 그 탓에 세밑을 맞이한 온갖 단체방에는 예를 갖춘 덕담이 넘쳐난다. 부지런한 이는 12월 29일부터 축언을 올리니, 30일과 31일에는 이런 유의 인사가 화산처럼 폭발한다. 마찬가지로 1월 1일에는 새해가 됐으니 ‘오늘 해야, 진짜’라는 듯 또 덕담이 긴 철새의 행렬처럼 이어진다.
그러고 ‘아, 마침내 끝났군!’ 하고 손을 털면 내 생일이다. 알리고 싶지 않지만 메신저 프로그램이 자동으로 알려준다. 그러면 며칠 내내 줄기차게 사회적 인사를 주고받았던 인물이 ‘뭐야. 할 게 아직도 남았어?’라는 듯 어색하게 인사를 건넨다.
그럼 나는 어쩐지 송구해지고 만다. 그래서 매번 ‘죄송합니다. 새해에 본격적으로 업무에 복귀할 때 일을 방해한 느낌이 드네요’라는 뉘앙스로 답례한다. 그 탓에 매해 초마다 ‘대체 왜 1월 2일 따위에 태어나 매번 미안해지는 거야’ 하고 되뇐다.
그러면 아예 축하를 안 해주는 건 어떠냐고? 솔직히 말해 전혀 개의치 않는다. 생일은 내가 뭔가를 노력해서 이룬 결과가 아니다. 열심히 소설을 써서 문학상을 받은 것도, 한여름에 땀흘려 학습한 결과로 받은 성적도 아니다.
어쩌다 보니 이 세상에 태어나버린, 실로 단순한 결과일 뿐이다. 그래서 나는 생일에 말 한마디 않고 넘어가도 하나도 섭섭하지 않다.
물론 그렇다 해서 이 글에 축하 댓글을 남기는 걸 말리진 않는다(이렇게 썼지만, 아무런 댓글도 없겠지요? 다 알고 있어요. 에헴). 그나저나 이리 썼지만, 나도 한국인이기에 그냥 지나칠 수는 없다. 늦었지만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최민석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