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 헌법주의자의 배신

입력 2025-01-07 00:32

헌법에 남다른 집착 보였지만 비상계엄 합리화에 동원해
민주주의 작동 원리 무시하고 결국 체포영장 무효라며 불복
제왕적 대통령제 문제점 노출 권력 분산 개헌 필요성 높아져

“지청장, 자리에서 일어서 보세요. 증인은 혹시 조직을 사랑합니까?”

“예, 대단히 사랑하고 있습니다.”

“사랑합니까? 혹시 사람에 충성하는 것은 아니에요?”

“저는 사람에 충성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2013년 10월 21일 서울고검 국정감사장에 나온 윤석열 수원지검 여주지청장과 국회 법제사법위원 정갑윤 새누리당 의원의 문답이다. 이 말은 권력자와 정권에 맹목적으로 충성하지 않는 검사 윤석열을 대중에게 각인시킨 상징이 됐다. 검찰 조직만을 우선시하는 ‘검찰주의자’라는 지적이 나왔지만 검사 윤석열은 그때마다 “나는 헌법주의자”라고 받아쳤다.

긴 시간 윤석열 대통령의 워딩을 되짚어보면 헌법을 향한 그의 집착은 남달랐다. 헌법은 그의 단골 소재였다. 문재인정부와 갈등을 겪다 2021년 3월 검찰총장직을 사퇴하면서 그는 “헌법 정신과 법치 시스템이 파괴되고 있다.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겠다”고 했다. 석 달 뒤 대선 출마선언에선 “헌법 정신을 회복하겠다”고 했고, 이듬해 봄 대통령 당선 직후엔 헌법 정신 존중, 의회 존중, 야당과의 협치를 강조했다.

전 국민은 물론 전 세계까지 충격에 빠뜨린 비상계엄 선포 담화에도 헌법은 빠짐없이 등장한다. 윤 대통령은 비상계엄을 합리화하는 데 적극 사용했다. 더불어민주당을 향해 “국헌 문란 세력” “자유민주주의 헌정 질서를 파괴하는 괴물”이라고 했고, 비상계엄은 “대통령의 헌법적 결단이자 통치행위” “헌정 질서와 국헌을 지키고 회복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국회 탄핵소추 직전 담화에선 “계엄을 내란 행위로 보는 것은 헌법과 법체계를 심각한 위험에 빠뜨리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헌법은 대통령에게 비상계엄 선포권을 부여하지만, 이것이 민주주의를 공격하고 멈추라는 건 아니다. 비상계엄은 정부, 법원 권한에 대한 특별 조치를 할 수 있으나 국회 권한을 통제할 수는 없다. 국회, 지방의회, 정당 활동, 정치적 결사를 금지한 비상계엄 포고령과 “문을 부수고 들어가 (의원들을) 끄집어내라”고 했던 그의 지시는 민주주의 체제의 기본 원칙을 깡그리 무시한 것이다.

결국 최소한의 조건도 명분도 갖추지 못한 비상계엄은 대한민국이 수십 년간 쌓아 올린 헌법과 법체계를 무너뜨렸다. 국회에서 탄핵안이 통과됐던 노무현·박근혜 전 대통령과 달리 윤 대통령의 탄핵소추 사유는 민주주의를 공격하고 배척하려 했던 명백한 반헌법적 행위다.

돌이켜보면 헌법주의자를 자처해온 윤 대통령의 이율배반적인 반헌법적 인식과 행위는 이전부터 뚜렷한 징후가 있었다. 그간 야당은 국정운영을 방해하는 반국가세력으로, 한동훈 전 국민의힘 대표는 배신자로 여겼다. 특히 “범죄자집단 소굴” “종북 반국가세력” “망국의 원흉”으로 야당을 표현한 것은 견제와 균형이라는 민주주의 작동 원리를 무시한 전근대적인 인식이 발현된 것이다.

지난해 4월 총선의 집권여당 참패, 거대 야당의 출범과 야당의 일방적 입법폭주 원인을 제공한 것은 다름 아닌 윤 대통령의 일방적인 국정 운영이다. 야당과의 갈등은 정치적으로 해결하는 게 정석이지만 그는 여기서도 ‘헌법적 결단’이라며 헌법을 다시 들이댔다. 여소야대 국면과 야당의 특검 공세 등은 역대 대통령들이 흔히 겪었던 상황이다. 그러나 대통령이 문제 해결 방식으로 비상계엄을 선포하진 않았다.

탄핵 소추 뒤에도 윤 대통령의 반헌법적 행보는 이어지고 있다. 윤 대통령은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의 수사 권한 문제를 지적하며 출석 요구에 불응했다. 법원의 체포영장 발부에도 영장 자체가 불법이자 무효라며 불복했다. 헌법재판소에 권한쟁의심판과 효력정지 가처분신청을 제기하면서 “무너진 법치주의를 세우는 과정”이라고 주장한다.

비상식적인 헌법주의자의 행위는 결과적으로 제왕적 대통령제의 문제점을 더 노골적으로 드러내게 했다. 권력 분산을 위한 개헌의 필요성도 더 높아졌다. 정치권, 학계는 한국 사회를 극단적 상황으로 내모는 제왕적 대통령제를 손보지 않는 한 비극은 반복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대통령의 실패는 불행히도 개인의 실패가 아니다. 그 피해는 오롯이 국민이 떠안아야 한다.

헌법과 법치를 강조했던 헌법주의자는 민주주의와 국민을 배신했다. 그를 지도자로 여겼던 대다수 국민은 분노하고 있다. 그토록 배신을 증오했던 헌법주의자의 비참한 말로다.

남혁상 편집국 부국장 hsna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