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을새김] 찍히면 죽는다

입력 2025-01-07 00:38

10여년 전 ‘여의도 텔레토비’란 방송 코너가 있었다. 텔레토비 탈을 쓰고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 등 정치인을 흉내 내 인기를 끌었다. 국민은 한 번씩 웃고 넘어갔지만 박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상황은 심각해졌다. 이 코너를 만든 방송사를 소유한 CJ그룹이 대통령에게 찍혔다는 소문이 났고, 실제 CJ는 그룹 설립 이후 최대 위기를 맞았다. 특별세무조사로 수백억원의 세금을 부과받았고, 총수는 구속됐다. 총수의 누나였던 부회장도 청와대 압박에 경영권을 놓고 미국으로 떠났다. 최순실씨 국정농단 재판에서 밝혀졌듯 당시 청와대는 공정거래위원회 등 정부기관을 동원해 끊임없이 CJ를 괴롭혔다. CJ뿐 아니라 삼성 SK 롯데 등 10대 그룹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대기업 총수들은 대통령에게 찍히지 않기 위해 미르재단 등을 지원했다가 구속되거나 재판에 넘겨졌다.

비단 박근혜정부 때만의 일이 아니다. 지난 수십년간 한국에서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특정 기업이 부침을 겪는 상황이 반복됐다. 과거에는 5년마다 일어났는데 최근 대통령 탄핵 사건이 잇따라 터지면서 그 주기가 더 짧아지고 있다. 국어사전에서 정경분리(政經分離)를 찾으면 3가지 뜻이 나온다. 이 중 하나는 ‘국가가 경제 영역에 간섭하는 것을 방지하여 자유로운 경제 활동을 보장하는 일’이라고 쓰여 있다. 이 뜻에 비춰 한국 사회에서 정경분리 원칙이 제대로 작동된 적이 광복 이래 한 번이라도 있었나 싶다.

윤석열정부도 정경분리가 아닌 정경유착에 집착했다. 말로는 기업 살리기를 한다고 했지만 카카오 등 한번 찍힌 기업은 총수 구속 등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러면서 개국공신들을 대기업에 ‘낙하산’으로 꽂기 바빴다. 총수가 검찰 조사 선상에 오른 모 대기업에 대통령실 출신 3명이 비슷한 시기에 임원으로 가기도 했다. 대기업 총수들 역시 대통령 눈 밖에 날까 취향에도 없는 떡볶이와 폭탄주를 먹느라 애를 먹었다.

탄핵정국이 시작되면서 숨죽인 기업들은 물밑에서는 오리처럼 물갈퀴를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모 대형 금융사는 야당 실세와 연이 닿아 있는 인사를 모셔왔고, 야당 출신 보좌관들의 몸값은 치솟고 있다. 이번 정부 들어 영입을 꺼려왔던 호남지역 출신 퇴직 고위공무원들도 여기저기서 영입 제의가 들어오고 있다고 한다. 일각에서는 기업들의 이런 영리한 행태를 비판하지만 기업들이 알아서 줄을 서게 만든 건 권력을 쥔 정치인들이다. 한 재계 관계자는 “‘부자는 망해도 3년은 간다’는 말이 있지만 한국 정치에선 권력을 잃으면 3일도 못 가더라. ‘찍히면 죽는다’는 학습효과는 지금도 유효하지 않으냐”고 반문했다.

새해가 밝았지만 대기업들은 향후 경영전략을 확정하지 못하고 있다. 정상적인 기업이라면 최소 10년 앞을 내다보는 경영 플랜을 짜야 하는데, 탄핵 인용 여부와 차기 대선 등 불확실성이 최고조에 달한 상황에서는 언감생심이다. 원전업계 한 인사는 “문재인정부 때 죽다 살아났는데 다시 그때로 돌아갈 것 같은 불안감이 엄습하고 있다”고 말했다. 벌써 탄핵이 인용되고 정권교체를 가정한 기업 살생부가 회자하고 있다.

정치가 혼탁해지면서 국가신인도는 떨어지고, 환율은 급등하고 있다. 투자를 약속했던 외국인들은 계약 해지를 요구하고 있다. 수출로 먹고살아야 할 나라인데 도널드 트럼프 미 행정부 출범 등 대외 현실도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안갯속이다. 이런 상황에서 더욱 절실히 요구되는 것은 누가 권력을 쥐든 기업을 뒤에서 좌지우지할 생각 없이 국민만 보고 경제를 운영하겠다는 정경분리 원칙이다.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쪽박을 깨지는 말아야 하지 않겠나.

이성규 산업1부장 zhibag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