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초롱] 어른이 된다는 것

입력 2025-01-08 00:33

오랫동안 조직에서 2인자로 지냈다. 솔직히 그 역할을 꽤 잘해냈다고 자부한다. 가끔 대표와 후배들의 의견 차이를 조율하는 것이 외줄타기처럼 쉽지 않았다. “어휴, 낀 세대라 너무 힘들어!”라고 한탄한 적도 있지만, 눈치껏 1인자의 의중만 잘 파악하면 큰 책임질 일 없이 시키는 일만 하면 되니까 편한 면이 더 컸던 것 같다.

그러다 얼마 전 갑자기 부서장이 공석이 되는 바람에 덜컥 그 자리에 앉게 됐다. 뜻하지 않은 일이었기에 부담스러운 마음이 앞섰다. 뭔가를 최종 결정해야 한다는 게 쉽지 않았고, 그간 편하게 지내던 후배들이 갑자기 나를 어려워하고 멀리하는 것 같아 내심 섭섭한 마음도 들었다.

주변에서는 요즘 MZ세대들과 매일 점심을 먹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들 했다. 그래서 “이제부터 점심은 각자 자유롭게 하고, 일주일에 한 번만 같이 먹는 것으로 해요.” 호기롭게 이야기해 놓고는 막상 혼자 밥을 먹어야 할 때는 조금 서글프기도 했다. 분명히 나도 예전에 부서장이 약속이 생기면 홀가분했었는데 말이다.

문득 어른이 된다는 건 외로움을 잘 견디는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 밥을 먹고, 혼자 결정하는 일에 익숙해지는 그런 일. 그러고 보니 지금껏 내가 멋지고 닮고 싶다고 생각했던 어른들은 홀로 자신의 삶을 잘 살아내고 있던 이들이었던 것 같다. 어쩌면 남에게 훈수를 두고 오지랖을 부리는 것도, 그 사람을 진정 위해서라기보다는 자신의 외로움을 달래보려는 심사가 아니었을까.

요즘 많은 젊은이들이 롤모델로 삼고 싶어 하는 유튜버 장명숙은 한국인 최초로 밀라노로 유학을 다녀와 워킹맘으로 살아온 할머니다. 유튜브 계정 이름 ‘밀라논나’는 ‘밀라노’와 이탈리아어로 할머니를 뜻하는 ‘논나’를 합쳐서 만들었다는데, 거의 100만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찾아와 인생의 지혜를 구하고 있다. 최근 출간한 저서 ‘오롯이 내 인생이잖아요’에서는 “오롯이 내 인생이기에 자기다움을 지키며 살기를, 자기만의 어른다움을 찾아가며 살기를 저는 꿈꿉니다”라고 말한다.

또 다른 유튜브 콘텐츠 ‘집밥 클래스&상담소’에서는 유튜버 ‘애리’가 사람들을 집으로 초대해 직접 만든 건강한 요리를 나눠 먹으며 각자의 삶을 이야기하고 공감한다. 40㎏ 가까이 감량한 후 고도비만을 위한 다이어트센터를 차린 사람, 조울증을 겪어 입원했었다는 사람, 불임으로 고통받다가 건강한 식단으로 임신에 성공한 사람 등 다양한 사연이 많다.

‘밀라논나’와 ‘애리’. 두 사람의 공통점은 누구보다 당당하게 살아왔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말하는 대로 살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누군가를 쉽게 평가하거나 지적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분들이 살아온 이야기를 듣는 것 자체로 힐링이 된다. “괜찮아, 괜찮아” 하고 위로받는 것 같다.

‘회복탄력성’과 ‘내면소통’의 저자 김주환 연세대 교수는 우리 사회가 불행해지는 원인으로 삶의 모든 의사결정을 타인의 시선을 의식해 결정하는 ‘인정 중독’을 꼽는다. 여기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남이 아닌 내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중요하고, 남의 평가에서 자유롭기 위해서는 먼저 내가 타인을 평가하지 않고 사랑하고 존중해야 한다고 한다. 이렇게 할 때 내가 삶의 주인공이 되고, 진정한 어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도 누군가의 지시를 그대로 따라왔던 편안한 삶에서 나만의 어른다움을 찾아가는 길 위에 서 있는 것 같다. 올해는 같이 놀아 달라고 매달리는 어른, 꼰대같이 훈계질 하는 어른이 아니라 스스로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발걸음이 본이 되는 어른다운 어른이 되고 싶다.

안지현 대전고법 상임조정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