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엽의 글로벌 기업 탐구] 독특한 수평적 공동체 문화… 인류의 일상 바꾼 혁신을 낳다

입력 2025-01-07 00:35

1958년 창업 이래 소재과학 초점
다양한 인류 당면 문제 해결 앞장

직급 상관없이 동료로 동등 대우
매년 '가장 일하기 좋은 기업' 선정
성과주의 한국 기업에 시사점 줘

혁신을 말하면 애플이나 테슬라처럼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드는 기업을 떠올리기 쉽다. 그러나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인류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꾼, 혁신을 끊임없이 창출한 기업이 있다. 획기적 소재인 고어텍스를 개발한 고어(W. L. Gore)다. 소재회사인 까닭에 고어텍스 외에 일반인에게 친숙한 제품은 많지 않지만 고어는 광범위한 산업에서 수많은 제품의 핵심 소재로 대체 불가능한 혁신을 연쇄적으로 창출했다.

소재과학 기술혁신 앞장선 기업

획기적 소재인 고어텍스를 개발한 동갑내기 부부 윌버트 고어와 제네비브 고어. 고어 홈페이지

고어는 1958년 미국 동부 델라웨어주 작은 도시 뉴워크에서 듀퐁 연구원이던 45세 동갑부부 윌버트 고어와 제네비브 고어가 자택 지하실에서 창업했다. 창업 이래 고어는 테플론(PTFE)으로 코팅한 플랫 전선케이블을 시작으로 소재과학에 초점을 맞춰 다양한 산업이 당면한 난제를 해결했다. 테플론은 우주선, 컴퓨터, 의료기기, 조리기구, 전자제품 등에 필수적인 특수 소재다. 특히 1969년 테플론을 혁신해 확산테플론(ePTFE)을 개발했는데 이것이 바로 숨쉬는 방수 소재인 고어텍스다. 이는 통기성과 방수성을 동시에 극대화하는 혁신적 소재로 전 세계 아웃도어 의류 분야를 근본적으로 바꿨다. 극지방 탐험대는 물론 에베레스트 등반대와 나사 우주인도 모두 고어텍스 의류를 착용한 결과 브랜드인 고어텍스가 보통명사가 될 정도였다.

비상장기업으로 현재 규모가 종업원 1만2000명 정도인 고어의 창업 이래 전략적 포커스는 소재과학, 기술혁신, 인류의 당면문제 해결 3가지였다. 고어 제품은 광범위한 산업에 공급되지만 철저하게 소재에 집중한다. 대다수 제조업은 소재가 필요하므로 혁신적 신소재를 개발할 수만 있다면 고어의 성장잠재력은 무궁무진한 것이다. 고어의 경쟁우위는 압도적 기술혁신이다. 고기능성 섬유는 물론 전자제품 소재, 인체친화적 임플란트 소재, 우주복 소재 등 다양한 분야의 소재 관련 기술적 문제들을 혁신적으로 해결했다. 그 결과 고어는 현재 소재분야 핵심기술 특허를 3500종 이상 보유하면서 모든 산업을 통틀어 ‘세계에서 가장 혁신적 기업’으로 평가된다.

창업 때부터 고어는 항상 자기 제품이 어떻게 인류의 당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인류 최대 난제인 환경오염을 줄일 혁신적 의류 소재를 만들고, 생체흡수성이 높은 인공장기 소재를 개발해 의료문제 해결에 기여했다. 또 환경 규제에 순응하는 것을 넘어 정부 기준을 훨씬 초과하는 친환경 제품을 개발하기 위해 대규모 연구를 수행했다. 고어는 앞으로도 수익성과 상관없이 소재 기술로 인류의 문제를 해결할 기회만 있으면 언제든지 과감히 도전하겠다고 선언한다.

연쇄적 혁신의 원천 수평적 공동체 문화

고어의 혁신은 독특한 수평적 공동체 문화에서 나온다. 인간 잠재력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고어는 누구나 창조적 역량을 가지고 있다고 믿고 모든 구성원이 창조성을 극대화할 수 있는 수평적 공동체 문화를 추구했다. 특히 강조한 2가지는 구성원 존중과 적극적 협업이다. 고어는 직급에 상관없이 모든 구성원을 종업원이 아닌 ‘동료’로 부르며 동등하게 대우한다.

신입 직원도 동료이므로 경영진과도 서로 존중하고 수평적으로 협업하도록 한다. 모든 구성원에게 자율적 권한을 전적으로 제공하는데 신입 직원도 상사 명령에 따라 수동적으로 일하지 않고 주체적으로 다양한 동료들과 도전적 업무를 시도토록 한다. 그 결과 고어에서는 직급에 상관없이 대다수 구성원이 스스로를 리더라고 부른다.

공식 규칙과 절차, 위계질서에 집착하는 관료제 구조는 창조적 혁신을 억압한다며 철저히 배제한다. 고어에는 관료제의 상징인 조직표가 아예 없다. 규정집이나 매뉴얼도 자유로운 창조적 사고를 억압하기 때문에 만들지 않는다.

따라서 공식 권한이라는 개념이 아예 없는데, 심지어 최고경영자(CEO)도 공식 권한이 규정돼 있지 않다. 대신 모든 구성원이 주체로서 자율적으로 다른 구성원들과 자유롭게 상호 학습하며 협업하는 일종의 격자형 조직을 지향한다. 각 구성원이 자유롭게 자신의 네트워크를 구축해 학습하고 협업하며 가치를 창출하라는 것이다.

고어는 창업 때부터 지켜온 4가지 핵심 가치인 ‘누구나 자율적으로 혁신을 시도할 수 있는 자유’ ‘다양한 직급과 배경의 구성원에게 차별 없이 풍부한 기회를 제공하는 공정’ ‘동료와 고객에 대한 자발적 헌신’ 그리고 ‘핵심 원칙의 철저한 준수’를 강조한다. 이를 실행하기 위해 채용에 특별히 많은 투자를 하는데, 선발 기준으로 기술역량의 적합성을 넘어 고어의 독특한 문화적 가치관에 대한 공감을 가장 중시한다.

문화적 가치관은 창업주 윌버트 고어의 핵심 관심사였다. 그는 창업 때부터 “어떻게 하면 계층이 아예 없고 모든 구성원이 서로 자유롭게 대화할 수 있는 회사를 만들 수 있을까? 상관이나 관리자가 따로 없이 자율적으로 일하는 회사는 불가능할까? 각 구성원이 위에서 부여된 과업이 아니라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는 없을까?” 같은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며 실천했다. 그 결과 고어는 ‘세계에서 가장 일하기 좋은 기업’으로 매년 선정됐고, 이직률도 유사 규모 기업 평균의 5분의 1이 안 될 정도로 구성원의 충성심과 주인의식이 높다.

고어의 과제와 시사점

고어가 세계 최고의 연쇄적 혁신 기업이라는 사실에는 논란의 여지가 없다. 물론 고어에도 한계는 있다. 무엇보다 성장의 한계다. 고어와 같은 공동체 문화에 기반한 혁신 창출은 대규모 조직에서는 실행하기 어렵다. 때문에 고어는 창업 67주년을 맞은 글로벌 선두기업이지만 규모는 1만2000명 정도에 머무른다. 규모성장이 기업의 궁극적 목적은 아니지만 가치 창출의 파급력을 극대화하는 데는 아무래도 큰 기업이 상대적으로 유리한 점이 많다.

그렇지만 고어의 수평적 공동체 문화는 인류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진정한 창조적 혁신은 실패의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율적 실험과 도전, 이익추구 수단이 아닌 인류 문제해결 자체에 대한 순수한 열정, 상하 없는 수평적 동료관계, 그리고 구성원의 주인의식에서 나온다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이런 면에서 고어의 독특한 경영방식은 오너를 정점으로 일사불란한 수직적 통제를 추구하는 권위주의적 조직, 재계순위 등 외형성장에 대한 집착하는 전략, 그리고 눈앞의 수익 창출을 최우선시하는 극단적 단기 성과주의 문화에 사로잡힌 우리 기업들의 현재 한계봉착 위기에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신동엽 연세대 경영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