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2025년 세계 대전망’에서 도널드 트럼프 집권 2기의 국제 정세나 인플레이션 이후 세계 중앙은행에 닥칠 도전 과제 같은 거대 담론 말고도 와일드카드 10개를 선별해 ‘믿기 어렵지만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일들’을 제시했다. 그중 첫 번째로 내민 와일드카드가 ‘태양 폭풍에 의한 세계의 혼란’이다. 태양은 전기적 성질을 지닌 하전입자를 분출하는데, 이를 태양풍이라고 부른다. 태양풍에서 비롯된 대표적 현상이 오로라다. 태양이 수억t의 입자를 분출하면 지자기 폭풍, 혹은 태양 폭풍이라는 표현이 사용된다. 태양풍을 능가하는 태양 폭풍이라면 인공위성과 전자기기, 전력망을 마비시키고 항공 해운 운송망을 교란할 수 있다.
태양 폭풍에 따른 최대 피해는 1859년 ‘캐링턴 사건’이 꼽힌다. 당시 강력한 태양 폭풍이 북미와 유럽 전역의 전신기(전보를 치는 기계)를 파손했고, 오로라를 극지방에서 적도 주변인 쿠바, 자메이카, 콜롬비아로까지 확장시켰다. 그해 9월 영국 천문학자 크리스토퍼 캐링턴이 태양에서 흑점을 관측하던 중 플레어를 발견하면서 캐링턴 사건으로 불리게 됐다. 지금도 천문학계에서 태양 폭풍의 최대 강도는 ‘캐링턴급’으로 설명된다. 1989년 3월 태양 폭풍은 캐나다 퀘벡주 전역의 전력망을 마비시켜 주민 600만명이 9시간 동안 정전 피해를 겪었다. 최근에는 2022년 2월 미국 항공우주기업 스페이스X의 스타링크 인공위성 38개가 태양 폭풍으로 파손된 사례가 보고됐다.
태양 활동의 강도는 11년 주기로 달라지는데, 올해는 극대기에 해당한다. 이코노미스트가 전세계적 정치 경제적 혼란 속에서 인류의 관심 밖으로 멀어진 태양 폭풍을 올해 세계 대전망의 첫 번째 와일드카드로 제시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이코노미스트는 “올해 대규모 태양 폭풍이 발생하면 전례 없는 영향을 받을 수 있다”며 “전력망 복구에만 수개월이 소요되고, 수천개의 인공위성이 작동을 멈춰 항공 해운 운송망을 무너뜨리면 물과 식량이 유통되지 않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영국 보험사 로이드는 태양 활동의 지난 극대기 무렵인 2013년 보고서에서 캐링턴급 태양 폭풍에 따른 피해액을 미국에서만 최대 2조6000억 달러(약 3800조원)로 추산했다. 당시는 모바일 플랫폼이 지금만큼 활성화되지 않았던 때다. 음식 배달과 택시 호출, 소셜미디어를 통한 정보 공유까지 많은 일상을 스마트폰에 의존하는 현대문명에서 태양 폭풍은 재앙이 될 수 있다.
전조는 이미 나타났다. 지난해 5월과 10월 미국 남부 앨라배마주와 이탈리아 시칠리아에서 오로라가 목격됐다. 미 해양대기청(NOAA)은 새해 첫날인 지난 1일 태양 폭풍 경보에서 “심각 단계인 G4 등급에 도달했다”고 밝혔다. 미국의 태양 폭풍 경보는 G1~G5의 5단계로 구분되며 숫자가 클수록 강하다는 의미다. G4 등급만 해도 드문 수준으로, 지난해 미국에서 모두 4차례만 발령됐다. NOAA는 당초 지난 연말까지 G3 등급이던 태양 폭풍이 새해부터 잦아들 것으로 예상했지만 오히려 강해지자 경계심을 유지하고 있다. 이코노미스트는 태양 폭풍 외에도 달에서 4세대(4G) 이동통신망 가동, 새로운 팬데믹 발생, 금지약물을 허용하는 국제대회 개최, 러시아의 우주 핵무기 배치, 동물 명의 은행 계좌 개설, 북대서양 해류 유속 둔화, 고대 유물 속 새로운 문건 발굴, 화산 폭발에 의한 혼란, 외계 생명체 증거 발견을 올해의 와일드카드로 제시했다. 믿기 어려운 일들을 현실로 마주한 지금의 세상에서 무슨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는 않을 것이다.
김철오 국제부 차장 kcopd@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