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 애도하는 삶

입력 2025-01-06 00:33 수정 2025-01-06 00:33

롤랑 바르트는 어머니를 여읜 뒤 몇 년에 걸쳐 ‘애도 일기’를 쓴다. 그는 탁월한 작가이며 철학자이지만 ‘애도 일기’에서 사용한 문장과 어휘는 단순하다. 거의 유아적이라고 느껴질 정도의 단순함이 더욱 애달프다. 그는 슬프다고, 괴롭다고 반복적으로 이야기한다. 슬픔이나 괴로움을 해석하려 하지 않고 단어의 의미가 지워질 때까지 계속해서 슬프다고 말한다. 괴롭다고 쓴다. 슬픔과 괴로움이라는 말 속에서 살아간다.

말은 비좁은 공간이다. 삶에는 언제나 슬픔이라는 단어를 초과하는 감정이 찾아온다. 그러나 우리가 슬플 때, 슬프다고 말할 수 있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나의 슬픔을 들어줄 수 있는 타자가 존재한다는 사실 역시 중요하다. 슬픔이라고 말하고 나서야 우리는 슬픔을 딛고 다음 감정으로 넘어갈 수 있다. 그러므로 슬프다고 말해야 하며, 슬프다고 말하는 타자의 목소리를 들어줘야 한다. 감정은 회피를 통해 종료되지 않는다. 어떤 슬픔은 발설하고 표현함으로써 마침내 서서히 잦아들 것이며, 어떤 슬픔은 그 파도의 세기가 줄어들지언정 끝없이 되돌아와 한 사람에게 주어진 내면의 해변을 반복적으로 무너뜨릴 것이다.

트라우마가 된 고통은 한 인간의 현재와 미래를 계속해 과거의 그 자리로 끌어당긴다. 트라우마를 겪은 인간에게 시간은 일방향으로 흐르지 않고 나선의 형상을 띤다. 고통스러운 과거는 다시, 또다시 현재가 되고 미래가 된다. 어떤 사건은 남은 삶을 과거로 끌어당기는 인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도록 만들지만 우리는 함께 애도할 수 있다. 자신과 타인의 상실을 기억하고 슬퍼할 수 있다. 애도한다는 건 내가 아직 이곳에 남아 있다는 뜻이다. 가족과 친구는 물론 동료 시민들까지, 나의 삶이 끝날 때까지 가깝거나 먼 타인들을 잃어가야 한다는 사실은 무척이나 괴롭다. 그러나 몸을 가진 인간으로서 슬픔이라는 감정을 느끼고 나누고 감당하는 일, 우리가 그럴 수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우리의 운명이자 역능일 것이다.

김선오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