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 두렵고 을씨년스러운 2025년

입력 2025-01-03 00:38

안팎의 경제·외교 악재 이은
지난해 12월의 초현실적 사태
모두들 대한민국 위기라 불러

과거에는 정치 리더십이 국민
하나로 모아 위기 넘겼는데
이젠 정치가 갈등·분열 부채질

개혁 실종, 각자도생의 한국
120년 전 을사년이 연상된다

비상계엄 사태로 시작해 대통령 및 대통령 권한대행 탄핵으로 이어졌고 항공기 참사로 마무리됐다. ‘45년 만’, ‘사상 초유’, ‘최악’이라는 수식어들이 보여주듯 21세기 선진 국가에서 상상하기 어려운 사건 사고들이 2024년 12월 한 달 새 일어났다. 사람들은 우울감과 수치심 속에서 새해를 맞이했다. 여기에 서민 경제는 벼랑끝으로 몰리고 있고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등 지정학적 격변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다들 대한민국에 위기가 닥쳤다고 한다.

과거에도 여러 위기가 있었다. 경제위기였던 외환·금융·코로나19 위기, 이전 두 차례 탄핵 사태와 같은 사회·정치 불안이 대표적이다. 지금과 다른 건 국민을 하나로 묶는 정치가 살아있었다는 점이다. 경제위기 때는 굳건한 리더십, 여야의 동참, 국민의 호응이라는 3박자가 어우러졌다. 김대중정부는 노동계에 우호적이었지만 정리해고 등 구조조정의 발판을 마련했다. 위기 극복을 위한 읍참마속에 개혁의 동력은 커졌다. 이명박정부는 40차례 청와대 벙커회의를 통해 금융위기 돌파구 마련에 힘을 쏟았다. 리더의 솔선수범, 민·관 합작품인 한·미 통화 스와프 체결, 국민 지지가 국난 탈출을 이끌었다. 코로나19 때는 국민이 일상의 불편을 감수하고 정부의 전염병 퇴치 및 경제 살리기에 동참했다.

탄핵의 전개 과정도 판이했다. 2004년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소추 때는 고건 대통령 권한대행의 안정적 국정 운영이 빛을 발했다. 야당조차 고 대행의 역할에 힘을 실었고 정국은 평온을 되찾았다. 2016년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소추에선 여당 의원 약 60명이 동참했다. 보수 진영도 일정 부분 질서 있는 후퇴를 받아들였다. 환율 불안도 없었고 탄핵 결정이 나온 해의 성장률은 전년도보다 높았다.

성공적 위기 극복은 한국의 자산이었고 세계가 우리를 높이 평가하는 지점이다. 그런데 그런 자부심이 허물어져 가고 있다. 지난달 일들은 정치의 실패가 보여준 압축물이다. 계엄과 잇단 탄핵은 정치 리더십의 오남용이 부른 폐해다. 대통령은 권한을 절제하지 못하며 국격을 실추시켰다. 주도권을 쥔 야당도 국정 안정보다 권력 휘두르기에 도취됐다. 무안 제주항공 사고에도 국익보다 지역 이권에 경도돼 부적합한 공항을 탄생시킨 정치 논리가 자리잡았다. 정쟁의 극단화, 포퓰리즘, 공동체 의식 부재가 쌓이면서 설득, 조화, 타협이라는 정치 본질이 설자리를 잃었다.

경제만 놓고 보면 외환위기가 지금보다 심각했다. 1998년 성장률은 -5.1%였고 지난해 성장률은 2% 초반대다. 대통령 탄핵 사태도 세 번째로, 노하우가 없지 않았다. 정치가 중심을 잡는다면 못 넘을 수준의 역경이 아니다. 그럼에도 현재 위기에 많은 이들이 암담해 한다. 새해 첫날의 풍경이 이를 설명해준다. 대통령실 참모진은 대통령 권한대행에 항명하는 집단 사의 소동을 벌였다. 직무정지된 윤석열 대통령은 관저 앞 극렬 지지층을 격려하는 편지를 보냈다. 사실상 자신의 체포영장 집행을 막아 달라는 주문이었다. 국가 지도자와 컨트롤타워 조직이 국민 통합, 사회질서·법치의 가치를 헌신짝처럼 버리는 현실에서 무슨 위기 극복을 논하겠는가.

올해는 초고령사회(65세 이상이 인구의 20% 이상) 원년이다. 미래세대 부담을 줄이고 사회를 유지하려면 연금, 노동개혁이 필수인데 멈춰버렸다. 이견을 조정하고 갈등을 해소할 정치는 사라졌다. 각자도생의 한국사회는 병들고 있다. 성장이 정점을 찍고 내리막길에 접어든 ‘피크 코리아’는 이제 현실이다. 정치가 무너질 때마다 촛불을 들거나 온몸으로 계엄을 막은 ‘위대한 국민’이 있다고 위안 삼았지만 글쎄다. 2010년대 이후 국민이 선택한 3명의 대통령 모두 결과적으로 실패했다. 하나같이 무능, 독선, 내로남불의 공통점을 지녔다. 조기 대선이 치러진다면 가장 지지율이 높아 차기 대통령으로 유력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도 도덕성, 국민통합 면에서 낙제점을 면치 못한다. 불의를 보면 일어선다던 ‘위대한 국민’도 정치 퇴보의 벽 앞에서는 힘을 못 쓴다. 우리의 자정 능력에 깊은 회의감이 든다.

분위기가 스산하다는 뜻의 ‘을씨년스럽다’는 120년 전 나라의 외교권을 박탈당한 ‘을사늑약’의 비통한 분위기에서 유래된 단어다. 대한민국 정치·경제·사회의 현재 모습이 구한말 때와 얼마나 달라졌다고 봐야 할까. 두렵고 을씨년스러운 ‘을사년’ 2025년이 개막됐다.

고세욱 논설위원 swko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