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새해에도 환경 분야의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플라스틱’이 될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말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국제 플라스틱 협약 제정이 올해로 미뤄지면서 추가 회의에선 반드시 협약을 도출해야 한다는 환경·시민단체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학계에선 미세플라스틱이 건강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연구 결과가 속속 나와 플라스틱 오염에 대한 경각심을 키우고 있다. 최근 국내에서도 처음으로 한국인 혈액에서 미세플라스틱이 검출된 연구가 발표되면서 지속가능한 순환경제 체계로의 전환을 서둘러야 한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참가자 88% 혈액에 미세플라스틱이
4일 이동욱 인하대병원 직업환경의학과 교수와 정재학 한국분석과학연구소장 연구팀이 공동 진행한 연구 논문을 보면 연구진은 성인 36명의 혈액에서 ㎖당 평균 4.2개 수준의 미세플라스틱 입자를 발견했다. 이 논문은 지난달 6일 국제 학술지에 게재됐다.
연구진은 20~60세 건강한 성인 36명을 대상으로 채혈을 진행하고, 적외선 분광법(μ-FTIR)과 라만 분광법(μ-Raman)을 활용해 이들의 혈액을 분석했다. 그 결과 36명 중 32명(88.9%)의 혈액에서 미세플라스틱이 검출됐다. 검출된 사람들에게서 나온 미세플라스틱 조각은 혈액 ㎖당 4.2개였다.
미세플라스틱은 5㎜보다 작은 플라스틱 조각을 말한다. 연구에서 확인된 플라스틱 입자 크기는 20~50마이크로미터였다. 가장 많이 나온 미세플라스틱 유형은 일회용기나 식품용기 등에 흔히 쓰이는 폴리프로필렌(PP)과 폴리스타이렌(PS)으로 확인됐다.
연구진은 참가자들의 생활습관과 체내 플라스틱의 연관성을 확인하기 위해 ‘냉장고 안 식품용기 비율’도 조사했다. 식품용기 중 플라스틱이 50% 미만이라고 답한 참여자들은 ㎖당 평균 2.4개의 미세플라스틱이 나왔지만 50% 이상인 참여자들은 평균 6.8개가 검출됐다. 연구진은 이들이 플라스틱 용기를 사용하는 과정에서 분해·방출되는 미세플라스틱을 다량 섭취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봤다.
연구진은 혈액 속 미세플라스틱이 많으면 염증과 관련한 단백질 수치가 올라가고, 혈액이 응고되는 시간도 길어지는 현상을 확인했다. 미세플라스틱이 염증 반응을 유발하거나 혈액 응고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한국인의 혈액 내 미세플라스틱과 그로 인한 신체 영향을 분석한 연구는 이번이 처음이다.
이동욱 교수는 국민일보와의 통화에서 “2022년 네덜란드 연구진이 인체 혈액에서 미세플라스틱이 검출된다는 보고서를 유명 저널에 발표했고, 관심이 생겨 그해부터 연구를 준비했다”며 “연구 결과 미세플라스틱이 생각보다 많이 나왔다고 느꼈다”고 했다. 다양한 환경적 요인 중 미세플라스틱이 의학계의 연구 주제로 주목받은 것은 비교적 최근이고, 연구 방법이 정립되면서 뇌졸중 등 인체에 미치는 영향이 발표되기 시작한 건 지난해부터라고 이 교수는 설명했다.
그는 “혈액 내에 단순히 ‘미세플라스틱이 있다, 없다’가 아니라 ‘어떤 형태로 얼마나 있는지’에 대한 정량적 의미를 해석할 기준이 없다”며 “학계에서 합의도 돼 있지 않다”고 말했다. 이어 “플라스틱 용기뿐만 아니라 즉석식품 소비, 해산물 섭취 등이 플라스틱 농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며 “추가 연구에선 참여자 수를 늘려 ‘어느 정도 이상이면 미세플라스틱이 많다’는 기준을 만들어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한국, 일관된 중장기 순환경제정책 필요”
이처럼 인간의 발명품인 플라스틱이 자연뿐만 아니라 인류의 생존을 위협한다는 증거가 늘고 있지만 국제사회의 움직임은 여전히 더디다. 지난해 11월 25일부터 12월 2일까지 부산에서 열린 ‘플라스틱 국제협약 성안을 위한 5차 정부 간 협상 위원회(INC-5)’는 산유국의 반대에 부닥쳐 결국 빈손 종료됐다. 100여개국이 플라스틱을 생산 단계부터 규제해야 한다고 뜻을 모았으나 사우디아라비아와 러시아 등이 강경한 반대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들은 재활용 등 폐기물 관리를 통해 플라스틱 오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국제사회는 2025년에 추가 회의(INC-5.2)를 개최해 논의를 이어가는 데에만 합의했을 뿐 구체적인 시기나 방식 등에 대해 결론을 내지 못했다. 환경부 관계자는 “유엔이 처음부터 다섯 차례 회의를 열어 협약을 제정하기로 했기 때문에 INC는 5차 회의가 종료된 것이 아니라 멈춘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며 “정부도 추가 회의 일정과 관련된 유엔환경계획(UNEP)의 통보를 기다리고 있지만 아직 시기를 예측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2019년 3억5000만t이었던 플라스틱 폐기물이 2060년에는 3배 늘어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한국은 2021년 기준 미국 중국 사우디아라비아에 이어 세계 4위 에틸렌(합성수지 등 화학제품 생산의 기본이 되는 화학물질) 생산 능력을 가진 국가다. 환경단체나 환경 전문가들은 한국이 플라스틱산업의 중추 역할을 하고 있는 만큼 플라스틱 오염 문제에도 선도적으로 나서서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유럽을 중심으로 확장되고 있는 플라스틱 관련 산업 규제에 대응키 위해서도 재생원료 사용 확대 등 순환경제 체계를 만드는 데 속도를 높여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환경정책 전문가인 국회미래연구원의 김은아 혁신성장그룹장은 “플라스틱 정책에서 앞서가고 있는 유럽연합은 2015년부터 순환경제 정책을 시작해 중장기적인 계획에 의해 법 제도화 과정을 밟아가고 있다”며 “한국의 플라스틱 정책은 2025년까지만 설계돼 있고, 정권이 바뀌거나 사회 분위기가 바뀌면 정책이 이행되지 않는 부분에서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산업계에서는 플라스틱 재생원료산업 여건이 갖춰지지 않으면 규제나 의무를 부여해도 따라갈 수 없다”며 “기술 개발이나 관련 투자 등 순환경제 기반을 조성하기 위해서라도 일관된 중장기적 정책 추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세종=박상은 기자 pse0212@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