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만사] 뒤늦은 감사 인사

입력 2025-01-03 00:37

그날 서울을 포함한 수도권에 기록적인 폭설이 내렸다. 적설량이 20~30㎝가 넘는 유례없는 눈폭탄. 뉴스에선 기상 관측이 시작된 이후 11월 기준 가장 많은 적설량이라고 했다. 갑작스러운 폭설로 시내 교통뿐 아니라 하늘길과 공항까지 마비됐다.

공교롭게도 대만에서 귀국을 준비하던 참이었다. 현지에선 비가 자주 올 것이라던 예상과 달리 날씨도 화창해 만족스러웠는데 결국 마지막날 일이 틀어지고 말았다. 타이베이 공항에서 예정된 탑승시간은 낮 12시쯤. 그런데 들뜬 분위기 속에 분주한 승객들과 달리 탑승 게이트 쪽은 유난히 조용했고, 탑승 안내가 몇 차례 바뀌면서 한국 날씨가 심상치 않음을 알게 됐다.

예정시간을 넘긴 뒤 탑승시간은 오후 2시쯤으로 한 차례 변경됐지만 언제 비행기를 탈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초조한 기다림이 계속된 끝에 공지된 시간은 오후 5시30분. 다행히 이번엔 시간을 지켜 탑승이 시작됐다. 장시간 대기여서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몇 시간 뒤 한국에 도착했을 땐 모든 절차가 무사히 끝나기를 기대하는 수밖에 없었다.

비행시간 자체는 얼마 걸리지 않았기 때문에 한결 마음이 편안했는데 고비는 또다시 찾아왔다. 비행기가 곧 인천국제공항에 착륙 예정이라는 기내방송이 나온 지 꽤 오래됐지만 비행기는 내려갈 생각이 없었다. 폭설이 쉽게 그치지 않은 데다 이미 내린 눈 때문에 공항 시설과 지상의 비행기 상태가 그야말로 최악이었던 탓이다. 승객들은 동요했다. 이미 시간은 밤 10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일부 승객 사이에서는 고성이 터져나왔다. 자리에서 안전하게 대기해 달라는 승무원의 당부에도 몸이 불편해진 승객들이 화장실과 복도를 오가기 시작했다. 몇 차례 고성과 항의가 이어진 끝에 기장이 상황을 설명했다. 요지는 현재 공항 상황이 매우 나빠 당분간 공중에서 대기해 달라는 관제 교신을 받았다는 내용이었다. 천재지변에 준하는 악천후를 탓할 수밖에 없었지만 객실 내 불안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착륙이 수월하지 않았던 것은 지상에서의 디아이싱(de-icing) 작업이 원활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비행기에 쌓인 눈과 얼음을 제거하는 작업은 비행기 안전을 위해 필수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내린 눈폭탄에 디아이싱이 필요한 비행기가 대거 몰리다보니 비행기 이착륙이 줄줄이 밀렸다.

객실 승무원들이 비축해둔 과자로 분위기를 진정시킨 지 얼마 되지 않아 마침내 비행기가 하강하기 시작했다. 공항 상태가 최악일 텐데 무사히 착륙할 수 있을지 걱정했지만 기장은 침착했고 안전하게 착륙했다. 이번엔 객실에서 박수가 나왔다.

모두가 안도의 한숨을 쉰 이후에도 지상 상황이 녹록지 않았다. 기장은 다시 기내방송으로 양해를 구했다. 예정된 항공기 주기장소에서 디아이싱 작업이 진행 중이어서 추가 대기가 필요하다는 설명이었다. 그러면서 다른 비행기의 경우 공중 대기로 연료를 다 소모한 탓에 착륙까지는 했지만 스스로 이동이 어려워 견인차량의 도움을 받을 정도로 상황이 어렵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공항 안으로 들어와보니 주변에 수화물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결항으로 이륙하지 못한 비행기에 실렸던 것들이었다. 그만큼 지상과 하늘 할 것 없이 공항 주변에 있던 모든 비행기와 승객, 승무원들에게 힘든 하루였다.

악조건의 날씨 속에서도 안전하게 착륙해 공항에 도착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악전고투했던 기장과 승무원들의 노력 덕분이었다. 다시 한번 이 글을 통해 그들에게 뒤늦은 감사 인사를 전한다.

백상진 뉴미디어팀장 shark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