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넘게 살던 서귀포에는 웬만해선 눈이 내리거나 쌓이지 않았다. 검은 돌담 위에, 또 반지를 한 초록의 동백잎에 눈이 조금 쌓였다 쳐도 다음 날 번쩍 해가 나면 일순간 사라졌다.
그렇다고 서귀포엔 거의 눈이 내리지 않는다고 말할 수도 없다. 1년에 한두 번씩 진짜 큰 눈이 내리곤 하는데, 그야말로 마을 전체가 고립되는 일이 종종 생기곤 했다. 지난겨울에는 조천읍의 친구 집에서 늦은 밤까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 서귀포로 넘어오는 길에 하필 큰 눈을 만난 탓에 한라산 중산간 도로 위에서 오도가도 못할 뻔한 일도 있다.
언젠가부터 소리 없이 그리고 끝없이 내리는 눈을 바라보는 마음이 서늘해진 건 한강 작가의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은 후였던 듯하다. “이상하지 눈은, 어떻게 하늘에서 저런 게 내려오지.” 주인공의 친구는 세상의 풍경을 압도적으로 바꿔버리는 눈을 보며 엄마의 어린 시절 아프고 아팠던 제주 4·3 사건의 기억을 떠올린다.
작가는 이후 한 인터뷰를 통해 “신이 있어야 할 자리에, 신의 공백 위로, 눈을 무엇으로 규정하기보다는 그렇게 눈을 느낄 수 있다면 좋겠다”고 말했다.
한강 작가는 ‘작별하지 않는다’ 출간 후 제주 4·3 사건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를 우리가 만들고 있는 매거진 ‘인iiin’ 때문이라 말했다. 우리는 매년 봄호에 제주 4·3 사건에 관한 다양한 콘텐츠를 제작·소개해 왔다.
제주를 드나들며 모았던 매거진 속에서 만난 늙은 할망의 담담하지만 처절했던 기억의 목소리를 통해 작가는 오랫동안 고민했던 삶 속의 죽음을 떠올렸을 것이며, 글을 쓰면서 동시에 죽음에서 삶으로 나아가는 스스로를 발견했을 것이다.
제주 근현대사를 통틀어 가장 고통스러웠던 사건은 지금까지도 제주 사람들에겐 아물지 못한 상처로 남아 있다. 제주는 그 어느 곳보다 공동체 의식과 결속력이 강한 지역이다. 섬 특유의 고립으로 인한 폐쇄성 때문만은 아니다.
제주 4·3 사건 등 의지와 상관없이 오랜 세월 겪어왔던 아픈 일들이 많았기에 어쩌면 서로를 지키고 보듬어야 하며 위로해야만 그 시간을 견뎌낼 수 있었을 것이다. 이번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으로 제주의 아픈 시간이 조금은 위로가 되었을 터다.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더 많은 사람들이 서로의 슬픔을 나누고 위로하다 보면 언젠가는 고통스럽기만 한 시간이 조금은 줄어들 것이라 믿는다.
더없이 어수선하며 고요하며 참담한 마음으로 새해의 아침을 맞았다. 그 어느 때보다 공동체의 가치가 중요한 시기라고 생각한다. 돌이켜보면 우리나라는 큰 위기 때마다 강력한 공동체 의식과 공동의 선을 추구하는 자세로 어려움을 이겨냈다. 어둡고 긴 터널은 언젠간 끝난다.
곧 다시 환한 세상으로 나아갈 때엔 우리 모두 활짝 웃을 수 있길, 비통함에 눈물 흘리고 있는 이웃과 지역을 위해 기도할 때다.
고선영 콘텐츠그룹 재주상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