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새 달력 들고/집으로 가는 밤// 무의 단면처럼/차고 깨끗한/달이 떴습니다.” 몇 해 전 펴낸 책 ‘서릿길을 셔벗셔벗’ 중에서 ‘근하신년’이라는 짧은 글을 여기 옮겨 본다. 세밑이면 아버지는 입김을 풍기며 일찌감치 집을 나서곤 했다. 마을회관에 들러 장기라도 두셨는지, 해 지고 어둑어둑할 무렵에야 집에 들어왔다. 뒷짐 진 손에 돌돌 만 달력을 쥐고 계셨다. 안방 벽에 조그만 못이 박혀 있었는데, 아버지는 매번 그 자리에 새 달력을 걸었다. 새해를 맞이하는 아버지 나름의 시무식이었다.
묵은 달력을 떼고 난 자리에 직사각형의 하얀 공백이 남았다. 평생 농사를 지었던 아버지는 달력을 의지해 절기를 셈했다. 달이 차고 기우는 모양을 보며 농사일을 계획했고, 계절의 변화를 기민하게 살폈다. 날짜 아래에는 칸이 쳐져 있었는데, ‘콩 서 말’ ‘팥 1만원’ ‘1일’ 따위의 메모가 적혀 있었다. 아마도 이웃과 추렴하거나 품앗이한 내용을 적어둔 내용이었을 것이다. 나의 기억 속에서 아버지는 ‘근하신년’이라고 적힌 달력을 말아 쥔 채, 눈이 채 녹지 않아 희끗희끗한 골목을 걸어간다. 겨울밤 하늘은 짙은 청남색이다. 지붕 위에는 금방 잘라낸 무의 단면처럼 차고 깨끗한 달이 떠 있다. 아버지가 평범하게 살았던 일상은 이제 다시 볼 수 없는 그리움이 됐다.
며칠 전 일어난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로 새해를 맞이하는 마음이 여느 때와 달리 무겁고 참담하다. 유가족들의 슬픔을 어찌 몇 줄 문장으로 위로할까. 그러나 새날이 오듯 우리에게는 일상의 반복을 견뎌낼 힘과 용기가 있음을 믿는다. 따라서 동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의 고통에 통감하며, 순수한 애도의 마음으로 기도할 수 있다. 달력을 걸었던 자리에 박힌 못을 뺀다. 못의 크기만큼 구멍이 뚫렸다. 그 구멍을 손가락으로 어루만지니, 주황색 녹이 묻어나온다. 아픈 자리를 가만 문질러 보는 새해 첫날이다.
신미나 시인 겸 웹툰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