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왕적 대통령제 종언 고할 때 개헌은 이제 결단의 문제”

입력 2025-01-02 03:11

‘의회주의자’를 자임하는 박병석(사진) 전 국회의장은 “12·3 비상계엄 사태로 현행 대통령제의 모순이 극명하게 드러났다. 이제는 제왕적 대통령제의 종언을 고해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그는 “권력을 제도적으로 견제하지 않으면 필연적으로 일탈이 일어난다”며 권력의 일탈을 막기 위한 제도적 대안으로 ‘분권형 대통령제’(이원집정부제)를 제시했다. 다만 정치적 혼란이 극심한 현 시점에서 정략적으로 개헌 논의를 꺼내서는 안 된다고 경계했다.

박 전 의장은 개헌과 동시에 정치문화 전반을 바꾸는 작업도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문했다. 그는 “대통령과 총리가 권한을 나누기만 해서는 지금과 같은 극단적 대립이 또다시 반복될 우려가 있다”며 “이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양원제를 도입하거나 선거제 개혁을 통해 다당제 환경을 구축해야 한다”고 말했다.

국민일보는 지난 27일 서울대 국제대학원에 자리한 박 전 의장 연구실에서 그를 만났다. 지난 5월 정계 은퇴 후 첫 언론 인터뷰다. 다음은 일문일답.

-국회의장 재임 시절부터 거듭 개헌을 강조했는데.

“계엄 사태를 겪으며 제왕적 대통령제를 바꿔야 한다는 국민적 공감대가 커졌다. 개헌 필요성이 절실해지고 절박해졌다. 현행 헌법 체제는 이른바 ‘87년 체제’다. 시간이 한 세대 이상 흐른 것이다. 국민소득만 해도 그때보다 10배 이상 뛰었다. 국제 정세도, 시대적 요구도 많이 변했다. 논의도 충분히 이뤄졌다. 개헌은 이제 결단의 문제다.”

-탄핵 정국에서의 개헌 논의에 대한 민감한 반응도 나온다.

“정권 초에는 개헌이 블랙홀처럼 모든 이슈를 빨아들인다는 이유로 안 한다. 그러다가 정권 중반기가 넘어가면 얘기를 꺼내는데 그때는 추진 동력이 부족하다. 개헌은 반드시 정권 초에 해야 한다. ‘선 개헌, 후 대선’이 성공 공식이다. 먼저 대선 후보들이 개헌안을 제시하고 투표로 평가받는 것이다. 다만 개헌 논의가 국정 혼란을 수습하는 데 영향을 주면 안 된다. 마치 혼란과 개헌을 교환하려는 것과 같은 인상을 주면 안 된다.”

-개헌의 핵심은 권력구조 개편인가.

“12·3 계엄으로 민주화와 산업화를 동시에 이룬 민주주의의 모범국에서 완전히 추락하게 됐다. 이제는 제왕적 대통령제의 종언을 고해야 할 때다. 방향은 크게 두 가지다. 먼저 대통령에게 집중된 권한을 국회로 나누는 수평적 권력 분산, 또 하나는 지방 분권이라는 수직적 권력 분산이다. 하지만 대통령의 권한을 나눠 국회로 가져온다고 해도 극단적으로 서로 대립할 경우 이를 스스로 견제하고 제어할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그래서 양원제를 도입하거나 연합 정치가 가능한 다당제 환경을 구축해야 한다. 대통령과 총리가 권한을 나누기만 해서는 극단적 대립이 반복될 우려가 있다. 이를 해소하는 데 필요한 것이 상원의 역할이다. 지금과 같은 격동의 시기에도 상원이 원로원의 역할을 했다면 중재가 가능했을 것이다.”

-대통령 4년 중임제 의견도 나온다.

“대통령 중임제에 대한 논의가 많은데, 중임제가 과연 제왕적 대통령제를 끝낼 수 있는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가령 대통령이 연임할 경우 독단적 행동이 견제받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더 중요한 것은 대통령의 권한을 분산시키고, 의회가 견제와 균형을 이루면서도 이를 조정할 수 있는 ‘제도’라고 본다.”

-87년 체제에서 대부분 대통령이 실패한 것으로 평가된다.

“좋은 정치가 되기 위해서는 좋은 대통령제와 좋은 대통령이 나와야 한다. 즉 제도와 사람의 결합이다. 제도를 잘 갖춰놓으면 사람의 부작용을 어느 정도 제어할 수 있으므로 제도를 고치는 것이다. 성공한 대통령이 드물다는 건 결국 제도에 결함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권력은 스스로 확대되고 스스로 강화하는 속성이 있다. 그래서 권력을 법과 제도로 견제하고 제어하지 않으면 일탈해버리고 만다. 그 일탈을 막고자 하는 게 개헌의 목표다.”

-대통령 ‘권한대행의 대행’ 국면까지 왔다.

“현 정국에서 가장 시급한 건 불확실성 해소다. 안보·외교·경제 등 정말 총체적 난국이다. 이런 불확실성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헌법재판소가 제대로 작동해 윤석열 대통령 탄핵 여부에 대한 결론을 최대한 빨리 내려야 한다. 헌법과 법률의 빈틈이 있을 때 이를 보완하는 게 바로 정치의 역할인데, 정치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계엄 사태 수습에 필요한 것은.

“무신불립(無信不立·신뢰가 없으면 바로 설 수 없다)을 강조하고 싶다. 국민의 신임을 잃은 정부는 국정을 끌고 갈 수 없다. 헌법재판소에서 어떤 결과가 나오든 윤 대통령이 국민 신뢰를 회복할 수 있겠나. 또 누가 뭐라고 해도 국정 운영의 최종 책임은 대통령과 여당에 있다. 국민의힘이 비상계엄 사태에 대한 공동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국민의힘은 진솔한 사과도 반성의 행동도 보이지 않는다.”

-야당은 ‘연쇄 탄핵’으로 돌파하려는 모습이다.

“야당도 계속되는 탄핵에는 조금 더 신중해야 한다. 정치는 타협이다.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할 때 일을 되게 하는는 게 바로 정치적 대타협이다. 지금이야말로 정치가 작동해야 할 때다. 정치 지도자들이 진솔하게 만나서 끊임없이 대화해야 한다. 막스 베버는 정치인의 3대 요소를 균형감각, 책임감, 열정이라고 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균형감각과 책임감이 부족해 보인다. 시류에 올라타거나 인기에 영합하면 항상 후회하게 된다.”

글=김판 기자, 사진=이한형 기자 pa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