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이 가득한 초겨울의 초가. 지붕과 담벼락에 걸쳐있는 늙은 대추나무의 보라색 긴 그림자가 인상주의의 냄새를 짙게 뿌리며 화면 전체가 명랑하다. 뜰에 누워 있는 개의 흰색, 개밥을 주러 나온 막내딸 옷의 빨강, 사철나무의 초록이 더해져 화면에 생기가 넘친다. 한국 인상주의의 효시로 평가받는 오지호(1905∼1982)의 이 작품 ‘남향집’은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돼 있고 2013년 등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작가가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사망한 후인 1985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추모 개인전이 열린 걸 계기로 아내 지양진은 그해 남편의 작품 34점을 기증했다. 교과서에도 실린 ‘남향집’이 보여주듯 가장 좋은 작품들로만 골라서 말이다.
전남 광양 전남도립미술관이 ‘남향집의 화가’ 오지호 탄생 120주년을 맞아 기념전을 하기에 최근 다녀왔다. 전시 제목 ‘오지호와 인상주의: 빛의 약동에서 색채로’는 모네처럼 시시각각 변하는 빛의 시각화에 초점을 두던 작품 세계가 점점 고흐와 세잔을 결합한 듯 격렬한 붓질의 색면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이행했음을 반영한 듯하다. 국립현대미술관과 공동 기획한 전시다. 평생에 걸쳐 그린 회화 100여점이 나왔다. 간판 작품 ‘남향집’이 나왔음은 물론이다.
전시를 찾아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사과밭’이란 제목으로 널리 알려진 ‘임금원(林檎園)’을 볼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여서다. 삼성가는 이건희 회장 사후인 2021년 4월 ‘이건희 홍라희 컬렉션’ 2만3000여점을 국가에 기증했다. 이 가운데 오지호 작품 14점이 국립현대미술관(4점) 광주시립미술관(5점) 전남도립미술관(5점)에 분산됐다. 하지만 컬렉터 이건희가 수집한 ‘사과밭’은 어디도 보내지 않았다. 유족이 소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만큼 이건희가 아낀 그림이라는 방증이기도 하다.
‘사과밭’은 오지호가 일본 도쿄미술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한 뒤 1년여를 보낸 고향 화순 생활을 접고 서울에서 동화백화점 선전부에서 일하다 개성 송도고보 미술교사로 옮긴 시절에 그렸다. 미술 유학을 함께 한 친구 김주경(1902∼1981)이 경성고보 교사로 전직하며 자신의 자리를 넘겨줬다.
“오월의 햇빛은 상당히 강렬하고 그리는 도중에 꽃은 자꾸 피었다. 왱왱거리는 벌들과 한가지로, 아침부터 저녁까지 이 임금원에서 사흘을 지냈다. 그리고 이 그림이 거의 완성되면서 꽃도 지기 시작했다.”
오지호는 사과 꽃이 질세라 사흘 만에 현장에서 인상주의의 붓질로 생명의 만개를 담았다. 당시 자식을 거느린 32세의 가장이었다. 오지호는 1937년에 이 작품을 그리기 한 해 전 급성 위궤양으로 죽다 살아난 적이 있다. 그 경험 때문인지 생명 탄생의 환희가 그림에서 묻어난다. 개성 시절은 일본 유학에서 배워온 서구의 인상주의를 실험하던 시기였다. ‘남향집’은 ‘사과밭’을 그린 뒤 2년 후 제작됐다. 이보다 앞서 아내를 그린 ‘처의 상’(1936)은 넓은 색면 처리 방식이 가미돼 후기 인상주의 세잔의 영향도 감지된다.
볼거리는 또 있다. 1938년 오지호가 김주경과 함께 낸 ‘이인화집(二人畵集)’이 나온 것이다. 일제강점기인 출간 당시 “최초의 원색 화집” “화집 출판의 효시” 등 극찬을 들었던 이 화집은 지금 봐도 고급스럽다. 인상주의 개척의 꿈에 부풀던 두 작가의 작품이 각 10점씩 총 20점 수록돼 있다. 이번에 실물 작품으로 현장에 나온 것은 ‘사과밭’ ‘처의 상’ 등 2점이다. 유족 등을 통해 나머지 작품의 출처를 확인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전시는 한국적 인상주의 개척자로서 오지호를 조명하는 만큼 영향을 준 도쿄미술학교의 화풍을 소개한다. 도쿄미술학교의 일본 유학 시절의 스승인 오카다 사브로스케와 후지시마 다케지의 작품, 또 오지호와 김용준, 김홍식의 졸업 작품(자화상)이 일본에서 건너왔다.
오지호는 1940년대 후반 낙향했고, 1949년부터는 광주 조선대 교수로 재직하며 창작 활동을 하고 후학을 길렀다. 무등산, 내장산, 목포 항구 등 남도의 산과 바다, 항구의 풍경 등이 이 시기 화폭에 들어온다. 전시는 시기별로 나눠 1부에서 해방 이전을, 2부에서 해방 이후부터 60년대까지, 3부에서는 1970년대 이후를 다룬다. 특히 1974년, 1980년 두 차례의 해외여행을 통해 담아낸 유럽 풍경에서는 일획의 붓질로 색면을 표현하는 완숙미가 넘친다. 아들 오승우와 오승윤, 손자 오병욱의 작품도 함께 나와 오지호 집안의 ‘미술 DNA’를 엿볼 수 있다. 3월 2일까지.
광양=손영옥 미술전문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