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위보다 더 큰 상실의 경험
잠시 잊을 수 있어도 늘 남아
낮은 목소리로 함께 애도하길
잠시 잊을 수 있어도 늘 남아
낮은 목소리로 함께 애도하길
이 글을 쓰면서 2024년의 마지막 며칠을 보냈다. 쓰던 것을 모두 지워버리고 다시 자리에 앉았기 때문이다. 솔직히 처음에 무슨 내용을 썼는지도 지금은 가뭇하다. 꽃이었던가, 별이었던가, 거리에 휘몰아치는 매서운 바람을 견디며 반짝이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였던가. 새해 첫 글에 평소 좋아하던 폴란드 시인 비스와바 심보르스카의 ‘두 번은 없다’를 인용하려고 적어둔 구절은 이렇다. “두 번은 없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런 연습 없이 태어나서/ 아무런 훈련 없이 죽는다.” 나는 그 고약한 메모를 구겨서 쓰레기통에 던져넣었다.
참혹한 사고가 발생한 남쪽 도시는 외할아버지가 일하던 곳이었다. 기억 속의 그는 근사한 정복을 입은 경찰관이었고, 어린 나와 누나는 그곳의 바닷가에서 작은 게나 망둥이를 잡으며 여름방학을 보냈다. 젊은 의경들이 종종 우리와 놀아주거나 말동무를 해주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따뜻한 바닷바람이 불던 그 도시에 비통한 울음이 흘러넘치는 모습을 상상하는 일이 나로서는 그리 쉽지 않다.
하지만 재난은 언제나 예고 없이 도래한다. 바로 조금 전까지 세속의 바닷가에서 함께 떠들며 놀던 이들은 돌연히 울며 피안의 강을 건너고, 평범했던 우리의 일상은 고통스러운 애도의 시공간으로 변한다. 어쩌면 몇 번의 우연과 필연이 교차했더라면 나 역시 그 바닷가 도시에서 살아가고 있거나, 심지어 사고가 예정된 항공기에 탑승했을 수도 있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그저 운이 좋았거나 혹은 다음 재난을 위해 예비되어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타인을 향한 모든 애도는 조금쯤 자기 자신을 향한 것이기도 하다.
고통스러운 상실의 이유를 따져 묻는 이들에게 신은 대체로 침묵한다. 원로 종교학자 정진홍 교수는 저서 ‘신 이야기’에서 어쩌면 그 침묵을 설명하기 위해 인간은 신이 있다고 주장해야 했을지도 모른다고 썼다. 아마 자신의 내장을 끊임없이 할퀴고 파내려가며 고통의 이유를 찾기보다는, 신이라는 절대적 존재의 알 수 없는 섭리가 우리를 위해 작동한다고 믿는 것이 더 견딜 만하다는 뜻일 것이다.
하지만 신의 섭리를 믿더라도 상실을 온전히 치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니콜 키드먼이 주연한 영화 ‘래빗 홀’에서 네 살배기 아들을 잃은 주인공 베카는 자식을 떠나보낸 부부들의 모임에 참석했다가 신이 천사가 필요해서 아이를 데려갔다는 말에 악을 쓴다. “신이 천사가 필요해서 아이를 데려갔다고요? 왜 다른 천사를 만들지 않고 내 아이를 데려갔나요?” 내장 속에서 끓어오르는 듯한 그런 울부짖음을 들으면 설령 신이라도 침묵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상실의 경험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에게 남는 것은 우울이라고 했다. 그 우울은 가히 파괴적이다. 적절한 애도의 경험이 없다면 그들은 끝없이 자신을 비난하다 결국 자아를 잃어버리고 만다. 따라서 애도는 더없이 중요하다. 그러나 피와 살을 지닌 이들에게 완전한 극복이란 너무나 어렵다. ‘래빗 홀’에서 베카의 어머니 다이앤 역시 아들을 약물중독으로 잃었다. 이 슬픔이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것인지를 묻는 베카에게 다이앤은 말한다. “처음에는 바위만큼 컸다가 자꾸 작아지지. 결국 조약돌만해져 주머니에 넣어다닐 수 있게 되고, 때로는 잊기도 해. 하지만 문득 손을 넣어 보면 거기에 분명히 있단다.”
애도가 단순히 슬픔을 표출하고 망각하는 과정이 아니라고 말한 이는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데리다였다. 애도는 결코 끝나지 않으며, 주머니의 조약돌은 사라지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상실이 지닌 의미를 온전히 헤아릴 수 없다. 다만 주머니 속에 슬픔 한 조각을 지닌 채로 새해를 맞을 수는 있을 것이다. 그들이 지닌 슬픔처럼 날카롭고 육중하지는 않겠지만, 주머니에 오래오래 조약돌을 지닌 채 그것들이 나직하게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함께 들을 수는 있다.
김현호 사진비평가·보스토크 프레스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