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윤의 딴생각] 명태와 코다리

입력 2025-01-04 00:32

매일 지나다니는 골목에 코다리조림을 파는 식당이 있다. 동네에서 잘하기로 소문난 곳이라 점심 저녁 할 것 없이 문전성시를 이룬다. 학교에서 급식을 먹던 시절, 코다리조림이 나오는 날이면 절규하곤 했던 나는 이 집 앞을 지나며 입맛 한번 다셔 본 적이 없다. 짜고 딱딱한 데다가 살은 없고 뼈만 굵은 코다리조림을 도대체 무슨 맛으로 먹는단 말인가. 계 모임을 할 때마다 코다리조림을 먹는 엄마는 이런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코다리조림은 아주머니들의 전유물이라고, 영양사 선생님도 아주머니이기에 코다리조림을 식단에 넣는 것이라고, 나와 코다리조림은 아무런 접점이 없는 음식이라고 말이다.

시간은 흐르고 흘러 소녀는 아주머니가 됐다. 김밥이나 샐러드로 끼니를 때우면 현기증이 나서 추어탕이나 도가니탕처럼 영양가 있는 음식을 잘만 찾으면서도 코다리조림만은 먹지 않았다. 그것은 내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었다. 하지만 어김없이 새해는 밝았고 나는 아주머니의 세계로 한 발짝 더 들어섰다. 그런 나에게 코다리조림은 운명처럼 다가왔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코다리조림 식당 앞을 지나다가 그 안으로 미끄러지듯 들어가고야 만 것이다. 거부할 수 없는 이끌림이라고밖에는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다. ‘사십 세 미만 출입 금지’라는 경고문이 붙어 있기라도 한 것처럼 식당 안은 나이 든 사람들로 바글바글했다.

“코다리조림 하나 드려요?” 종업원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물었다. 돈가스나 고등어구이 같은 음식도 메뉴에 있었건만 누가 봐도 코다리조림을 먹을 것처럼 생겼던 모양이지. 고개를 끄덕이며 습관처럼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때마침 연락이 뜸했던 친구에게 안부 메시지가 왔다. 답장을 보내면 대화가 길어질 것 같아 고민하다가 어차피 해야 할 일이라면 빨리 해치워버리는 쪽이 낫겠다 싶어 그동안 잘 지냈느냐고 대답했다. 친구의 수다가 이어지는 사이 각종 반찬이 식탁을 채웠다. 친구의 근황보다 이 도토리묵이 얼마나 탱글탱글한지, 저 고사리나물은 얼마큼 고소한지가 더 궁금했던 나는 “언제 밥 한번 먹자”고 말하며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언제가 언제인지는 말하지 않았다.

도토리묵은 생각보다 더 탱글탱글했고 고사리나물은 아니나 다를까 고소했지만 어쩐지 입맛이 썼다. 닳고 닳은 사회인끼리 하는 인사치레를, 한때는 죽고 못 살던 친구에게 내뱉은 스스로가 영 마뜩잖았기 때문이다. 질깃한 고사리를 질겅질겅 씹으며 내가 한 말을 곱씹어 보았다. 시나브로 소원해진 친구와의 관계를 유지하는 데 에너지를 쏟느니 그걸 아껴 일하는 데 쓰는 편이 낫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 가만, 내가 요즘 일을 그리 열심히 했던가. 적당히 그럴싸해 보일 정도로 마무리해 온 지 꽤 되지 않았던가.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죽는 병에 걸리기라도 한 것처럼 열정을 불사르던 때도 있었는데. 아무래도 나는 변했나 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뻘건 양념을 뒤집어쓴 코다리가 식탁 위에 올랐다. “살아있는 명태는 생태, 그걸 말리면 북어, 얼리면 동태, 얼렸다 녹였다 하면 황태, 반건조하면 코다리가 되겠습니다.” 종업원은 엿장수처럼 가위를 짤깍이며 코다리의 뼈와 살을 분리했다. 가위가 코다리를 스칠 때마다 묵직한 살점이 툭 떨어져나왔다. 내가 알던 코다리는 코다리가 아니었다. 코다리가 코다리인 줄로만 알았지 명태에서 온 줄도 그제야 알았다. 게다가 그 맛있는 생태와 북어, 동태와 황태 역시 코다리와 맥을 같이하는 생선일 줄이야. 세상 풍파 다 겪어 이전과는 달라졌어도 변한 것은 그 나름대로 가치가 있구나. 매사에 능청스러워진 나의 행동을 연륜으로 만들어 가는 것은 나에게 주어진 숙제일 것이다.

숟가락으로 코다리 살을 뚝 잘라 입안에 넣었다. 쫀득한 식감 뒤에 퍼지는 고소한 풍미가 흡사 고급 어묵을 먹는 듯했다. 빨간 양념을 흠뻑 머금은 가래떡도 이어 넣었다. 그 맛은 떡볶이와 견주어도 손색없었다. 소녀에서 어른이 된 여자라면 코다리조림을 좋아하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으리라. 뼈에 붙은 살까지 열심히 발라 먹고서 식당 앞에 놓인 자판기에서 커피를 한잔 뽑았다. 커피가 내려지길 기다리는 동안 거울 속 내 얼굴을 살폈다. 화장기 하나 없이 누렇게 뜬 얼굴이 황태 저리 가라다. 눈썹을 치켜올리며 유들유들하게 웃어 본다. 어제보다 하나 더 늘어난 잔주름이 나이테처럼 눈가를 장식했다.

이주윤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