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 다시 흙으로

입력 2025-01-01 00:35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청년기에 한국전쟁을 겪고, 유신체제의 탄압 속에 고초를 겪었던 화가가 있다. 한국 근현대 미술사 단색화의 거목 윤형근이다. 화가 김환기의 사위이기도 했던 그는 시대의 폭력과 억압에 굴복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세 번의 복역과 한 번의 죽을 고비를 넘겼다. 그리고 만 45세에 비로소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꺾이지 않는 화가의 기백을 닮아 대범하고 묵직한 작품들은 예술가의 삶을 넘어 역사의 증언이자 인간 정신의 불굴을 상징하는 듯하다.

윤형근은 1990년 우에다 갤러리에서 열린 개인전에서 자신의 노트를 공개했다. “이 땅 위의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생각하면, 모든 것이 시간의 문제다. 나와 나의 그림도 그와 같이 될 것을 생각하면, 모든 것이 대수롭지 않다고 생각된다.” 역사상 가장 평화롭다는 시대에 나고 자란 나로서는 그의 경험이 빚어낸 분노와 울분의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다만 “모든 것은 흙으로 돌아간다”는 그의 말에 승화라는 단어를 잠시간 떠올렸다.

때때로 모든 것이 무(無)로 돌아간다는 사실에서 깊이 위로받는 순간들이 있다. 무엇인가를 이루려고 지나치게 애쓰다가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은 날들에. 불안에 기인한 집착인지, 노력의 강박인지 모를 것에서 숨이 턱 막힐 때다. 영원할 것처럼 보여도 언젠가 사라질 운명을 지닌 것들, 그중 하나인 나는 무엇을 위해 애쓰고 있는가, 그 과정에서 무엇을 잃고 있는가를 돌아보게 된다.

2007년 겨울, 윤형근은 자신의 예상대로 흙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가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그림은 아직 이 땅 위에 남아 사람들을 부르고 있다. 그의 그림을 보며 몸과 마음에 잔뜩 달라붙은 것들을 내려놓는다. 호흡과 맥박을 느끼며 심신을 가볍게 하고, 하루 몫의 생활과 노동과 감정에 충실하겠노라 다짐한다. 대수롭지 않아도 진실하게.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그 날까지.

함혜주 이리히 스튜디오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