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사 윤석열’을 빼곤 ‘대통령 윤석열’을 설명하기 어렵다. 윤 대통령은 범죄에 가차 없는 강골 특수부 검사로 이름을 날렸다. 2013년 10월 국정감사장에서 대학 시절부터 호형호제하던 조영곤 서울중앙지검장의 댓글수사 외압 의혹을 터뜨린 것도, 2019년 정권의 갖은 압력에도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일가 수사를 끝까지 끌고간 것도 ‘범죄는 처벌한다’는 집념의 발로였다고 본다. 이런 외골수적 기질은 검사로서의 미덕으로 평가됐고, 그는 어퍼컷을 날리며 대통령에 올랐다.
여의도 정치와 거리를 두겠다는 그에게 많은 이들이 검사 물을 빼는 게 우선이라고 고언했다. 수사 목표가 정해지면 일방적 힘의 우위 관계를 바탕으로 ‘저돌 맹진’하는 검사의 방식에는 정치가 발붙일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정치 권력의 정점인 대통령이 ‘죄가 되는가 되지 않는가’ ‘아군인가 적군인가’ 식의 이분법적 사고로 통치하면 정치 전반을 위태롭게 할 수 있다는 경고이기도 했다. 그러나 윤 대통령은 지금껏 정치를 한 적이 없다.
돌이켜보면 윤 대통령의 재임 2년7개월은 끊임없이 적을 만들어내고 처단하기 위해 싸우는 일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처음부터 제1의 적은 야당이었다. “거대 야당은 국민이 뽑은 대통령을 인정하지 않고 끌어내리기 위해 퇴진과 탄핵 선동을 멈추지 않았습니다.”(지난 12일 대국민 담화)
그에게 야당은 입법권을 수중에 넣고 공직자 탄핵과 대통령을 괴롭히는 특검법 발의를 반복하는 ‘헌정질서 파괴의 괴물’로 인식될 뿐이었다. 이재명 대표와 제대로 된 대화 테이블 한 번 만들지 않은 것도 가슴 깊숙이 자리한 적대감 때문이었을지 모른다.
적의 범주는 갈수록 확장됐다. 22대 국회 개원식과 시정연설을 연이어 보이콧하는 시점에 와서는 이미 여의도 전체를 적진으로 간주했던 것 아닌가 싶다. 집권여당 대표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준석 대표를 시작으로 김기현, 한동훈 대표까지 용산이 발산하는 살벌한 적의에 어느 누구도 버티지 못하고 튕겨져나갔다. 특히 20년 교분을 맺어온 한 전 대표와의 관계 단절 과정은 윤 대통령이 ‘비이성적 흥분 상태’에 놓여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줬다. 김건희 여사 문제를 두고 올 초부터 외부로 삐져나온 윤 대통령의 적대감은 비상계엄 당시 체포 대상자 리스트에 ‘우리 동훈이’를 올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정부 의료개혁에 반발하는 의료계, 사교육 시장과의 유착 정황이 나온 교육계, 정권 퇴진운동에 골몰하는 노동계 등 개혁 과제에 저항하고 도전하는 모든 집단, 정부에 비판적인 언론매체도 빠짐 없이 윤 대통령의 ‘데스 노트’에 적혔다.
결국 윤 대통령은 탄핵소추 되기 직전까지 적의로 성을 쌓고 그 속에서 자신에 딴지를 거는 모든 이들을 향한 분노를 키워왔던 것 같다. 극우 유튜브 채널이 주입하는 음모론의 망막으로 세상을 보는 사이 현실과 인식 간의 괴리는 더 커져갔을 터다. 막스 베버가 ‘정치가의 가장 큰 죄과’로 지목한 균형감각의 상실. 결국 적들로 사방이 포위된 위기 상황을 일거에 돌파할 수단은 ‘비상조치’밖에 없다는 망상적 확신으로까지 나아갔던 것 아닐까.
야당이 호시탐탐 나를 끌어내리려 한다는 불안감, 조급함이 극단적이고 폭력적인 방식으로 표출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아닌 밤중의’ 비상계엄은 그를 지지하던 국민마저 적으로 돌리고, 정권의 핵심 가치라는 자유민주주의와도 적으로 맞서는 최악의 패착이었다. 임기 후반기 국정운영 기조로 ‘양극화 해소’를 제시하고는 정작 사회 전체를 극심한 양극화로 몰고 가버린 헛발질. 그래도 윤 대통령은 “국민과 함께 끝까지 싸우겠다”고 한다. 스스로 등을 돌린 지금, 누구와 무엇을 위해 싸우겠다는 건지.
지호일 정치부장 blue5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