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최고 전직 대통령’ 카터 별세… 정치서도 도덕 추구한 기독인

입력 2024-12-30 18:43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2009년 11월 태국 치앙마이에서 ‘해비타트 프로젝트’로 주택을 완공한 뒤 박수를 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미국 제39대 대통령이자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29일(현지시간) 별세했다. 향년 100세. 카터 전 대통령은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정치에서도 도덕과 종교적 가치를 구현하기 위해 힘쓴 정치인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퇴임 후에도 소박한 모습으로 고향 주일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치는 한편, 국제 분쟁 해결에 ‘피스메이커’로 앞장서 ‘가장 위대한 전직 대통령’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카터 전 대통령은 이날 오후 조지아주 플레인스 자택에서 가족들에게 둘러싸인 채 평화롭게 세상을 떠났다고 카터재단이 밝혔다. 장례식은 정치적 고향인 조지아주 애틀랜타와 워싱턴DC에서 거행될 예정이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카터 전 대통령의 장례식을 국가가 주관하는 국장으로 엄수하겠다고 밝혔다. 또 다음 달 9일을 국가 애도의 날로 지정했다.

1924년 10월 1일생인 카터 전 대통령은 올해 100세로 최고령 전직 대통령이었다. 피부암인 흑색종 등으로 투병해온 그는 지난해 2월부터 연명 치료를 중단하고 자택에서 호스피스 돌봄을 받아왔다. 지난달 미국 대선 부재자 투표에 참여한 것이 마지막 공적 활동이었다.

플레인스에서 땅콩 농장을 운영하는 부친과 간호사인 모친 사이에서 4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난 카터는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해군 핵잠수함 부대에서 장교로 복무했다. 1953년 부친이 사망한 뒤 조지아로 돌아와 가업인 땅콩 농장을 이어받았다. 시민운동에 참여했던 카터는 1962년 조지아주 상원의원 선거에서 출마하며 정치에 입문했다. 이후 1970년 조지아 주지사에 당선됐지만 전국 정치에선 ‘무명’에 가까웠다.

하지만 워터게이트 사건과 베트남전으로 정치 불신이 커진 상황에서 카터는 기성 정치인과는 다른 참신하고 도덕적인 모습으로 미국민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겠다. 내가 거짓말을 한다면 나를 찍지 말아 달라”고 말할 정도로 정직을 앞세운 정치인이었다.

결국 민주당 후보로 선출된 카터는 1976년 대선에서 공화당 소속 현직 대통령이던 제럴드 포드를 가까스로 꺾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자신을 ‘평범한 사람(Everyman)’으로 묘사한 그는 스웨터를 즐겨 입으며 미국 남부의 ‘옆집 아저씨’ 같은 친숙한 이미지를 선보였다. 또 흑인 등 소수 인종과 여성을 고위 공직에 임명했다.

미·중 수교가 이뤄진 1979년 1월 백악관에서 중국 최고 지도자 덩샤오핑을 부인 로잘린 여사와 함께 맞이하는 모습. 지미카터라이브러리

그러나 재임 시절은 평탄치 않았다. 1970년대 후반 경기침체와 실업률 상승 탓에 취임 당시 70%대였던 지지율은 20 %대로 곤두박질쳤다. 도덕을 앞세운 외교 노선은 1979년 이란의 테헤란 미국대사관 인질 사건,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등으로 실패했다는 박한 평가를 받았다. 재임은 1977년부터 1981년까지 단임에 그쳤다. 1980년 대선에서 공화당 후보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에게 참패했다.

다만 카터가 주도한 ‘캠프데이비드 협정’은 중동에서 평화의 주춧돌을 놓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카터는 1978년 9월 이집트의 안와르 사다트 대통령과 이스라엘의 메나헴 베긴 총리를 대통령 별장인 캠프데이비드로 초대해 평화협정 체결을 주선했다.

한국과는 주한미군 철수 문제로 갈등을 겪기도 했다. 카터는 박정희 정권 당시 국내 인권 상황을 거론하며 주한미군의 단계적 철수를 대선 공약으로 제시했다. 박정희 정권이 내정 간섭이라고 반발하면서 한·미 관계에 긴장이 고조됐다.

1994년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 주석과 대화하는 카터 전 대통령. 카터센터

카터는 퇴임 이후인 1982년 카터재단을 설립해 국제 평화 문제에 천착했다. 1994년 북한이 국제원자력기구(IAEA) 탈퇴를 선언하면서 북핵 위기가 불거지자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 주석과 회담했다. 에티오피아와 수단 등 다른 분쟁 지역에서도 중재자로 활동해 2002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1984년부터 가난한 이들을 위해 망치와 톱을 들고 ‘해비타트 프로젝트’(사랑의 집짓기)에 적극 나섰다. 암 진단을 받은 뒤에도 플레인스에 있는 마라나타 침례교회에서 주일학교 교사로 헌신했다.

워싱턴=임성수 특파원 joyls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