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최경주 (21) 자주 할 수 없는 라운딩 대신 ‘123골프’ 두 세 번 돌아

입력 2024-12-31 03:03
최경주 장로가 2008년 서울 중구 롯데호텔에서 열린 제24회 신한동해오픈 참가선수 공동기자회견에서 취재진의 질문에 환하게 웃으며 답하고 있다.뉴시스

‘골프인생 은인’ 김재천 한서고교 이사장님이 졸업 전에 우승컵을 선물해주고 가라고 하셨기에 나는 약속을 꼭 지키고 싶었다. 이사장님은 학교 재정이 넉넉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나에게 부담을 주지 않겠다고 하시면서 편하게 운동하라고 하셨다. “이사장님, 제가 완도에서는 잘 친다고 해서 상경까지 했는데 서울놈들 너무 잘 쳐요. 내가 시합을 나간다 한들 순위권에도 못 든당게요. 내가 실력을 좀 더 쌓아야 되니께 고등학교 마칠 때까지 어쩌면 시합을 한 번도 못 나갈 수 있어요. 그건 좀 알고 계쇼.” “그래. 그건 니 마음대로 해라.”

이렇게 얘기가 되고 그제야 마음이 편해졌다. 만약에 이사장님이 왜 이것밖에 못 하느냐고 조금이라도 다그쳤다면 마음이 쫓겨 아마 연습에도 지장이 생겼을지 모른다.

이사장님은 ‘123 골프’를 제안하셨다. 123 골프는 롱홀 1개, 미드홀 2개, 쇼트홀 3개 등 6홀로 구성된 작은 골프장이다. 라운딩을 자주 나갈 수 없는 나는 경기도 분당에 있는 123 골프장을 두세 번 돌며 연습했다. “아니 이사장님, 1번홀에서 18번홀로 끝나는 정식 코스가 있는 골프장을 데리고 가야죠. 이렇게 조그만 데서 연습하면 실력이 늘겠어요.” “이놈아, 작아도 합쳐서 18홀 돌면 그것도 골프 친 거지.”

감사한 마음은 한결같았지만, 똑같은 코스를 여러 번 반복해서 돌자니 재미가 없었다. 어찌 됐든 나는 무사히 고등학교를 졸업을 앞두고 있었다. 하이라이트는 졸업식 날이었다. 나는 졸업장을 받기 위해 단상으로 올라갔다. 내 순서가 되자 이사장님이 졸업장을 안 주시는 거였다. “이사장님 왜 안 줘요.” “야 인마, 너 학교에다 뭘 해주고 가야지. 그 골프채도 반납해야지.” 나는 그 순간에 잔머리를 굴렸다. “이사장님 내가 프로 되기 전에 학교를 위해서 꼭 우승하겠습니다.” “니 그 약속 반드시 지켜야 된다잉. 그리고 골프채는.” “에이, 그 채는 이미 다 부서져 버렸죠.” “그래. 알았다.” 1990년 2월이었다.

졸업 후 나는 바로 군대에 가기로 했다. 아시안게임에서 메달을 따서 군 면제를 받는 건 상상도 못 하고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어차피 가야 할 군대면 빨리 다녀오자는 생각이었다. 신체검사에서도 1급 판정을 받아 무조건 현역으로 가야 했다. 군대에 가는 것에 대한 반감이나 이런 건 없었다. 다만 군 복무 기간을 하루라고 줄이고 싶은 마음이었다. 오랜 시간 골프채를 잡지 못하면 그동안 했던 연습과 스윙의 감이 떨어질까 걱정됐기 때문이다.

고향에 계신 아버지를 찾아갔다. “아부지. 나 좀 도와주쇼.” “뭔데 그러냐잉.” “저 완도에서 방위로 갈 수 있는 길이 있는지 한 번 알아봐 주쇼.” “그래. 알았다.”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났을 무렵이다. 정부에서 전 해안가 지역 초소 경계병을 각 지역 출신으로 배정하라는 공문이 내려왔다. 내 본적지는 전남 완도 화흥인데 그곳에도 초소가 있었다. 하루아침에 1급 현역에서 방위로 빠지게 된 것이다.

정리=유경진 기자 yk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