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예배 365-12월 31일]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그리스도인

입력 2024-12-31 03:03

찬송 : ‘주와 같이 길 가는 것’ 430장(통456)

신앙고백 : 사도신경

본문 : 요한복음 1장 12절


말씀 : 세례 요한이 그리스도의 초림을 예비한 것처럼 교회는 그리스도과 동행하면서 그분의 재림을 준비하는 증거 공동체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모범이 되신 것처럼 우리는 복음의 통전적 증인입니다. 통전적 증인으로 존재하고 살아가는 구체적 방법은 무엇일까요. 통전적 증거를 단순히 종교적 의무조항으로 깎아내리지 말아야 합니다. 기독교는 율법주의적 ‘행위 구원’을 거부하고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는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은혜 구원’은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시고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것(칭의)뿐 아니라 하나님을 닮아가는 과정(성화)도 모두 하나님의 도움으로 이뤄진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순종을 배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순종하도록 격려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율법주의가 인간의 노력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잘못이라면 하나님의 은혜를 핑계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구원론은 이단적인 오류입니다.

성경은 은혜 못지않게 행위를 강조합니다. 예컨대 바울 서신서에 나오는 동사 중에는 명령형이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명령은 순종의 행위를 요구합니다. 그래서 은혜와 순종(행위)의 상관관계를 이해해야 합니다. 종교의 논리가 아닌 사랑의 논리라야 두 개념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관계적 개념으로 일방통행 아닌 쌍방통행이고 인격적 교감과 자발성을 전제합니다. 서로의 균형이 무너진 소위 ‘갑을 관계’는 사랑이 아닙니다. 그래서 창조주시라도 인간에게 사랑을 강요하실 수 없습니다. 신앙은 자발적이어야 하고 강제하는 순간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하나님을 향한 자발적 맞사랑이 곧 순종이고 우리가 순종함으로 그 위대한 사랑의 관계가 실현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본문에서 믿음을 관계 용어, 즉 ‘영접’ 개념으로 풉니다. 며칠 전 우리는 성경 전체가 기독론적 계시라는 예수님의 주장을 살핀 바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이 기독론적 계시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인정하는 것만으로는 신앙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이어지는 구절에서 주님은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요 5:4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이 어떤 분인지 아는 단계에 머물지 말고 그분에게 오라는 말씀입니다. 그분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사랑의 관계로 들어가는 게 바로 믿음이고 영생이기 때문입니다.

영생은 먼 훗날 죽은 후에 들어가게 되는 삶이 아니라 주님을 만난 순간 시작되는 새롭고 기이한 삶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요 11:25~26) 주님과 사랑의 관계를 누리는 참된 영생을 지금 여기서 누리는 사람이 통전적 증인입니다. 그 특권을 누리고 나누는 평생 여정이 되기 바랍니다.

기도 : 세상을 사랑하셔서 인간의 몸으로 우리 곁에 오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주님과 사랑에 빠져 영생을 누리고 나누는 통전적 증인의 삶을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정민영 은퇴선교사(전 국제위클리프 부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