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힘은 계엄에 대한 시시비비에 입을 다물고, 더불어민주당의 헛발질만 기다리는 중이다. 윤석열 대통령의 내란 혐의는 어불성설이므로 탄핵소추는 잘못됐다는 아스팔트 보수층 뒤에서 야당이 국정 혼란을 부추긴다는 비판론의 부상을 바라는 것이다. 모두가 지저분해지면 옳고 그름의 경계는 허물어지고 피아의 구분만 남는 일들을 수차례 경험한 터였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반대파 56명 가운데 14명이 지금도 현역 활동 중이고, 탄핵에 가담했던 62명 중 55명은 제도권 정치 밖으로 밀려났다는 사실이 그렇다. 박 전 대통령 탄핵을 주도했던 7명은 지금 윤 대통령 탄핵 반대 선봉에 서 있다.
계엄 사태를 일으킨 대통령이 가까스로 탄핵소추되고, 초유의 대통령 권한대행 탄핵이 발생한 일련의 일들은 이런 이전투구 전략의 결과물로 읽힌다. 궁극의 목적은 정치적 생존이며, 그래서 공학적 계산만 따르려는 것이라면 셈법은 허황되지 않았다. 정치권이 혼란 수습은 뒷전이고 국가를 막장으로 이끈다는 양비론이 한 달도 안 돼 고개를 들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의 승리 모델도 그랬다. 트럼프는 부정선거 주장으로 의회 폭동을 부추겼고 미국 민주주의의 수치로까지 평가됐지만 대선에선 승리했다. 트럼프는 먹고사는 문제에 대한 분노가 민주주의 위협에 대한 우려를 가리기까지 부정선거 음모론에 빠진 극렬 지지층 마가(MAGA)를 다독이며 버티기 전략을 폈다. 트럼프와 일체화한 마가는 공화당에서 정통 보수를 서서히 소멸시켰다. 이제 공화당은 트럼프를 예찬하던 극단 세력이 주류가 되고, 선거 부정을 믿는 사람이 과반인 정당이 됐다. 대통령은 폭동을 부추겨도 처벌받지 않고, 가담자들은 사면을 기다리는 현실이 미국 민주주의 현주소로 여겨진다.
국민의힘이 그리는 전략에도 이런 기대가 담긴 듯하다. 실제 공당의 기반이 극단 세력 중심으로 재편하는 현상은 이미 서서히 시작되고 있다. 여론조사 업체들이 응답자의 특성을 분류하기 위해 묻는 정치 성향 조사에서 보수의 수치는 급격히 쪼그라들고 있다고 한다. 한국갤럽의 2023년 3월 1주 조사에서 전체 응답자의 34%였던 보수 응답자가 계엄을 거치면서 24%까지 줄었다. 보수라는 사실이 부끄러워 답변을 피하거나 성향을 바꾸는 사람들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내란 주장에 반발하고 탄핵 반대를 외치는 사람들은 이들 보수 응답자 중에서도 절반이다. 국민의힘은 이런 보수층에 뿌리를 두려 하고 있다. 현재의 정치적 풍토 속에서 아스팔트 보수층은 국민의힘을 스피커 삼아 극단의 목소리를 더욱 키울 것으로 보인다. 광화문 앞 탄핵 반대 집회에서 대통령 탄핵을 막아내지 못해 죄송하다며 큰절을 올린 여당 국회의원들이 벌써 등장했다. 하버드대 교수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은 저서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에서 공당이 극단주의 세력을 내부로 수용하고 이를 정당화할 때 민주주의의 기반이 침식한다고 지적했다.
탄핵을 찬성한 국민이 오롯이 민주당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점도 눈여겨봐야 한다. 민주당에 대한 비판론이 쌓이기 시작하면 정국은 더 혼탁해질 수밖에 없다. 탄핵심판이 진행되는 동안 내란죄 피의자의 주장은 아스팔트 보수들에게 교시로 내려지고, 민주당에 실망한 보수들을 다시 결집하려 할 것이다. 국민의힘은 지난주 내란 혐의 피의자인 김용현 전 국방장관의 항변을 당 차원에서 언론에 배포했다. 국민 10명 중 8명이 반대한 계엄에 대한 판단을 이렇게까지 전전긍긍하며 기다려야 할 일인가 싶다. 탄핵 정국은 한국 사회가 극단을 배척하고 새로운 길을 모색할 수 있을지를 결정짓는 갈림길이 될 것이다.
전웅빈 정치부 차장 im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