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국가세력 척결 앞세워도
결국 원인은 김건희 특검법
'공포 속 결단' 되풀이 되나
결국 원인은 김건희 특검법
'공포 속 결단' 되풀이 되나
투키디데스는 저작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서 “전쟁의 진정한 원인은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있다. 말하자면 아테나이의 세력 신장이 라케다이몬(스파르타)인들에게 공포감을 불러일으켜 전쟁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여러 표면적 이유에도 불구하고 전쟁은 아테네에 대한 스파르타의 두려움에서 시작됐다고 분석한 것이다. 신흥 세력에 대한 지배 세력의 공포 그리고 이로 인한 전쟁 위험은 이미 국제정치학에서 ‘투키디데스의 함정’이라는 비유로 널리 알려져 있다.
다만 투키디데스가 그의 저서에서 두려움과 공포를 언급한 가장 큰 이유는 이를 인간의 본성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결국 인간은 이로 인해 전쟁과 비슷한 극단적 행위를 계속 반복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인간의 본성에 따라 언젠가는 비슷한 형태로 반복될 미래사에 관해 명확한 진실을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은 내 역사 기술(記述)을 유용하게 여길 것이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의 서문이다.
2400여년 전에 살았던 한 역사가의 분석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너무나 당연한 얘기로 들린다. 그래서 그만큼 본질을 짚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왜 비상계엄을 선포했을까. 윤 대통령의 고위급 참모였던 한 인사는 “두려움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최근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다시 읽기 시작했다면서 꺼낸 얘기다.
실제 지난 3일 윤 대통령의 계엄 선포 담화는 전쟁을 개시하는 출사표에 가까웠다. 그는 6분가량의 담화에서 내란, 망국, 약탈, 척결, 풍전등화 같은 극단적인 표현을 쏟아냈다. 격한 어조로 “체제 전복을 노리는 반국가 세력의 준동으로부터 국민의 자유와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라고 강조했다. 일반 국민의 눈높이에서 크게 벗어난 인식이었다.
윤 대통령의 계엄 선포가 공포로 인한 것이라면 이 공포는 어디에서 비롯됐을까. 투키디데스는 “위협받을 때, 인간은 공포와 분노로 극단적인 결정을 내린다”고 설명했다. 윤 대통령이 표면적으로 밝힌 계엄 사유는 야당의 무더기 탄핵과 예산 삭감 크게 두 가지였다. 이로 인해 그는 집권 4년차 국정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는 위기의식에 사로잡혔을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계엄까지 선포할 만한 위협 요소라고 보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계엄 심의 국무회의에서 국무위원 전원이 계엄에 반대했다. 그들은 윤 대통령만큼 위기의식을 느끼지 못했던 걸까. 그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확실히 윤 대통령이 진정 공포를 느꼈던 위협 요소는 따로 있었을 것이다. 한동훈 전 국민의힘 대표가 계엄군의 체포 명단에 들어 있었던 사실이 이를 방증한다. 한 전 대표는 정부 관료 탄핵과 예산 삭감을 추진했던 야당과 대척점에 있었다. 체포 명단에 있어서는 안 되는 인사다. 이 때문에 김건희 여사에 대한 특검 수사 가능성이 계엄의 ‘트리거’로 작용했다는 강한 의심이 드는 것이다. 한 전 대표는 그간 윤 대통령의 ‘역린’인 김 여사 문제를 노골적으로 지적해 왔다. 계엄 선포 직전에는 ‘김건희 특검법’ 재표결을 앞두고 친한(친한동훈)계의 이탈 가능성도 제기됐다.
야당의 폭주와 가족에 대한 위협, 그로 인한 공포와 이어진 극단적 선택. 윤 대통령의 계엄은 다행히 빠르게 제압됐지만 그렇지 않았을 경우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상상하기 어렵다. 지금 상황도 역사적 비극이지만 아마 더 큰 비극이 있었을 것이다. 과거사가 그것을 증명한다.
문제는 우리가 또 다른 비극적 역사를 잉태하고 있다는 점이다. 탄핵이 인용되면 조기 대선을 치러야 한다. 제왕적 대통령제에 대한 비판 목소리가 높지만 매번 그랬듯 개헌은 달성되지 않을 것이다. 대통령 후보로 거론되는 사람들 중 누가 이미 공포를 느끼고 있을까. 우리는 그가 만들 극단적 세상을 이미 엿보고 있지 않은가.
역사의 효용은 불운한 과거사를 답습하지 않는 데 있다. 헤겔의 통찰대로라면 비록 그런 적은 거의 없지만.
문동성 사회2부 기자 theMo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