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은 실현되면 신화가 되지만 가능성 없으면 망상으로 치부돼
같은 사건도 이해관계 따라 기억이 다른 라쇼몽 효과처럼
극단 대립하는 지금 한국 정치 과연 누구의 망상으로 끝날까
같은 사건도 이해관계 따라 기억이 다른 라쇼몽 효과처럼
극단 대립하는 지금 한국 정치 과연 누구의 망상으로 끝날까
“꿈은 나의 현실이에요. 유일한 종류의 진짜 판타지예요. 환상은 흔한 일이죠. 나는 꿈속에서 살아가려고 노력해요(Dreams are my reality. The only kind of real fantasy. Illusions are a common thing. I try to live in dreams).”
프랑스 여배우 소피 마르소가 주연한 영화 ‘라붐(La Boum)’의 주제곡 ‘리얼리티(Reality)’의 일부다. 잠을 잘 때 꿈을 꾸는 동물도 있다지만 이는 단편적일 가능성이 크고 사피엔스 특유의 정교하고 복잡한 꿈이나 몽상과는 거리가 멀다고 한다.
꿈이나 몽상이 긍정적으로 실현되면 신화가 되지만 실현될 가능성이 없으면 망상으로 치부된다. 신화와 망상의 경계는 얼마나 많은 이들이 그 꿈과 판타지를 소비하느냐에 달렸다.
한 세대 전만 해도 K팝, K푸드, K뷰티, K콘텐츠가 전 세계적으로 열풍을 일으키리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웠다. 필자가 대학 시절에 이런 얘기를 했다면 망상이라고 모두의 비웃음을 샀을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 그때 꾸었던 꿈은 이뤄졌고, 이제 많은 이들이 한류 속에서 살아간다.
유발 하라리는 호모 사피엔스만이 인지 혁명과 언어의 발전을 통해 전설, 신화, 종교와 같은 허구를 창조할 수 있었고, 이를 통해 개인의 힘을 결집해 문명의 발전을 이뤘다고 말한다. 그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국가, 민족, 인권, 도덕, 정의 등은 모두 상상력의 산물이다.
이런 상상의 질서(imagined order)는 많은 이들이 그 이름을 부를 때에만 우리에게 와 꽃이 된다. 사피엔스에게 환상은 흔한 일이고, 우리가 사는 현실은 꿈과 사실의 경계 어딘가에 있다.
주관적 환상과 객관적 현실 사이의 긴장은 철학적 논쟁거리일 뿐만 아니라 영화에서도 자주 다뤄지는 주제다. 1950년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 ‘라쇼몽’에서 유래한 라쇼몽 효과는 하나의 사건을 사람들이 각자의 관점과 이해관계에 따라 서로 다르게 기억하고 해석하는 현상을 말한다.
이는 고의적인 거짓말이 아니더라도 무의식적인 기억의 왜곡으로도 발생한다. 따라서 어떤 꿈이나 몽상이 널리 받아들여진다고 해서 반드시 신화가 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집단적 망상으로 전락하기도 한다.
인기 SF 시리즈 ‘스타트렉’에 나온 “발버둥 쳐봐야 소용없다(Resistance is futile)”는 표현은 저항하는 적에게 포기를 종용할 때 쓰는 대사의 대명사가 됐다. 영화 ‘매트릭스’의 “모르는 게 약이다(Ignorance is bliss)”는 대사도 마찬가지다.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고 저항하기보다는 모른 척하고 현실에 순응하라는 뜻으로 쓰인다.
이 영화에서 인공지능이 사피엔스를 지배하기 위해 만든 가상현실 시스템인 매트릭스를 지키는 핵심 요원 스미스는 인간의 자유는 단지 환상에 불과하며 매트릭스의 통제를 벗어나려는 어떤 시도도 헛수고라고 말한다. ‘몸’은 2차 전지로 착취당하고 ‘마음’은 가상 세계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 중에서 반란을 꿈꾸는 이들의 싹을 자르기 위해서다.
이 영화에는 또 하나의 흥미로운 장면이 있다. 빨간 알약(red pill)을 먹으면 그 환상에서 깨어나 비록 고통스러울지라도 현실을 직시하는 선택을 하게 되고, 파란 알약(blue pill)을 먹으면 편안함과 무지를 선택해 조작됐지만 안전하고 익숙한 매트릭스 세계에 머무르게 된다.
진실을 갈망하던 주인공 네오는 선택의 기회가 오자 주저 없이 빨간 알약을 먹고 매트릭스에서 깨어나 인간의 자유와 생존을 위해 싸우는 전사이자 예언된 구원자 ‘디 원(The One)’으로 거듭난다. 자신의 저항과 투쟁이 의미 있는 이유는 바로 자신이 그걸 선택했기 때문(“Because I choose to”)이라는 의미심장한 말로 매트릭스의 집단적 망상을 거부한다.
이런 영화적 은유는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는, 극단적 대립으로 치닫는 작금의 정치 상황과 닮은 구석이 있다. 저마다 자신의 이야기가 진실이라고 주장하지만 아직 누구의 말이 진실인지 모른다. 윤석열 대통령은 ‘6시간 비상계엄’으로 ‘입법 독재’와 ‘부정선거’ 의혹에 저항하는 길을 선택했고, 민주당은 ‘열흘 만의 탄핵’으로 응수했다.
‘내란죄’가 덤으로 얹어진 이 탄핵 정국 시즌2에서 과연 누구의 꿈이 신화가 되고 누구의 몽상이 망상으로 끝날까. 앞으로 밝혀질 진실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리라.
구민교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