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도 정책도 안갯속으로… 계엄 후폭풍에 멈춰선 정부

입력 2024-12-28 03:52
연합뉴스

“동료 보좌관들과 만나면 다들 한숨부터 쉽니다. 내년 중점 사업을 위한 법안 발의를 준비 중이었는데, 지금 상황에서는 이게 진행될 수 있을지 회의감부터 듭니다. 논의하기 위해 접촉하는 공무원들도 의욕이 없어요.”

한 국민의힘 소속 보좌관은 최근의 정부부처 상황을 이렇게 전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12·3 비상계엄 사태로 가뜩이나 움직이지 않던 정부 조직 곳곳이 아예 마비 상태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장관의 사임이나 직무정지로 리더십 공백이 발생한 부처가 다수인 데다 국정을 책임지게 된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마저 27일 탄핵소추 가결로 직무정지되며, 각 부처의 업무 추진 동력은 바닥나 버렸다.

우원식 국회의장이 지난 14일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을 선포하고 있다. 탄핵안은 찬성 204표, 반대 85표, 무효 8표, 기권 3표로 의결됐다. 연합뉴스

당장 내년도 정책 구상마저 불투명해진 조직이 적지 않다. 우선 대통령실이 멈춰 서면서 주요 부처 고위급 인사가 안갯속이고, 현 정부 역점 정책에 투입됐던 실무자들 사이에서는 “현상 유지만 근근이 할 뿐 중장기 계획은 엄두도 낼 수 없다”는 토로가 나온다.

한 중앙행정기관 관계자는 국민일보와의 통화에서 “고위공무원 인사의 경우 대통령실 검증을 거치는데 지금은 그럴 수 없는 상황”이라며 “그러다 보니 국·부장 인사부터 신규 채용까지 사실상 멈춰 있다”고 말했다. 통상 3급 이상 고위공무원과 기관장 인사는 대통령실 검증 절차가 이뤄졌는데 현재는 진행이 어려운 상황이다.

비상계엄 사태 수사로 지휘부 주요 라인이 초토화된 국방부와 군은 사실상 아노미 상태다. 국방부 장관뿐 아니라 국군방첩사령관, 수도방위사령관, 특수전사령관, 국군정보사령관 등 핵심 수뇌부 보직이 모두 직무대리 체제로 운영되고 있다. 더욱이 이런 공백 상태가 장기화할 가능성이 크다. 여야 대치와 한 권한대행 직무정지 등으로 후임 국방부 장관 인선 논의조차 시작되지 못하는 실정이다. 전하규 국방부 대변인은 최근 국방부 정례 브리핑에서 ‘직무대리 체제에 대한 우려가 나온다’는 질의에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도 절차와 규정이 있는데 그것을 따르지 않을 수는 없다”며 “향후 상황이 전개되는 데 따라서 검토하고 필요한 후속 조치를 하겠다”고 말했다. 군 관계자들은 “내란 수사 등이 진행되면서 보직 이동 등 내부 인사가 중단된 곳이 있는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한 군 관계자는 “각 군과 사령부에서도 국방부와 협의해 진행해야만 하는 업무가 많은데 국방장관이 공석이면 영향이 있을 수밖에 없다”며 “중장기적으로 뚝심 있게 추진해 가야 할 사안에서는 힘을 받기가 어렵다”고 우려했다.

실제 안규백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군 당국에서 받은 자료에 따르면 12·3 비상계엄으로 취소·연기된 각 군의 훈련은 40여개에 이르는 것으로 집계됐다. 여기에는 한·미가 함께 계획한 연합훈련도 다수 포함됐다. 비상 상황에서 군사훈련도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면서 대북 군사 대비태세에 구멍이 생길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외교부도 재외공관 인사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김대기 전 대통령 비서실장의 주중 대사 임명 절차가 사실상 중단된 가운데 정재호 주중 대사는 조만간 귀국할 것으로 알려졌다. 주사우디아라비아 대사관도 신임 국방장관에 지명됐던 최병혁 대사가 자리를 비운 상태다.

또 다른 정부 관계자는 “부처 내에서 고위급 공무원 인사를 정리하려는 의지가 있던 인사가 이번 비상계엄으로 힘이 빠지면서 인사가 늦어질 가능성이 커졌다”며 “권한대행을 보좌하기 위한 인사 시스템은 그래도 제대로 돌아가고 있다고 들었지만, 한 권한대행 탄핵소추 가결로 이마저 혼란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대통령 탄핵 국면과 기관장들의 공백이 겹치면서 윤석열정부의 정책 지속성은 타격이 불가피해졌다. 대통령실이 ‘3대 게임 체인저’ 기술로 선정한 첨단 바이오, 양자, AI 및 반도체 분야의 국가위원회 출범 역시 기약이 어렵게 됐다. 국가인공지능위원회는 지난 9월 출범 이후 사실상 개점휴업 상태다. 정부가 이달 말까지 출범하기로 했던 국가바이오위원회와 양자전략위원회는 계획이 무기한 연기됐다.

각 부처는 내년도 정책 방향을 잡는 일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내년에는 미국 도널드 트럼프 신(新)행정부 출범과 한·일 수교 60주년, 북·러 밀착을 상징적으로 보여줄 러시아 전승절 80주년 행사 등 굵직한 외교·안보 사안이 줄줄이 예정돼 있다. 하지만 이를 주도해야 할 ‘정상 외교’는 윤 대통령의 직무정지로 ‘올스톱’된 상황이다. 야당의 연이은 탄핵안 카드로 한 권한대행 체제마저 멈춰 서면서 외교정책 정상화까지는 시일이 한참 걸릴 수 있다.

외교·안보 분야 한 당국자는 “외교·안보라는 게 대통령실에서 국가안전보장회의(NSC)를 비롯한 조직을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야 하는데, 대통령 직무정지로 대통령실 자체가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이라며 “부처 입장에서는 (대통령실에서) 조율이 돼 넘어오면 좋은데 그렇지 못한 상황인 것”이라고 말했다.

한 통일부 관계자는 “당장 부서별로 내년도 계획을 세워야 하는 때지만 움직이는 데 영향이 있을 수밖에 없다”며 “특히 윤석열정부에서 특화하고 강조된 사업들에 대한 고민이 늘어난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방위사업청 관계자는 “방산 수출에서 핵심적인 정책 결정을 해야 할 사안은 아직 없었기 때문에 심대한 차질이 있지는 않다”면서도 “다만 군 인사들이 방한 등을 계획할 때 여전히 망설일 수 있고, 이런 점은 장기적으로 악영향을 줄 수 있다”고 말했다.

이택현 박민지 박준상 기자 alle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