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이 유해 가습기 살균제 제조·판매 혐의로 SK케미칼과 애경산업 전 대표에게 금고형을 선고한 2심 판결을 뒤집었다. 먼저 기소된 옥시레킷벤키저 측과 이들을 공범으로 볼 수 없어 다시 판단해야 한다는 취지다. 피해자와 유족 측은 “누가 범인이란 말이냐”며 반발했다.
대법원 1부(주심 서경환 대법관)는 26일 업무상과실치사 등 혐의로 기소된 홍지호 전 SK케미칼 대표와 안용찬 전 애경산업 대표에게 각각 금고 4년을 선고한 원심을 파기하고 사건을 서울고법에 돌려보냈다. 가습기 살균제 사태는 1994년부터 출시·유통된 제품으로 사용자들이 숨지거나 상해를 입은 사건으로 2011년 처음 세상에 알려졌다.
상고심 쟁점은 여러 살균제를 함께 사용한 ‘복합사용 피해자’에 관한 판단이었다. 이번 사건 피해자 98명 중 94명은 SK케미칼 등이 제조·판매한 살균제와 옥시가 제조한 살균제를 함께 썼다. SK케미칼 살균제는 클로로메틸아이소티아졸리논(CMIT)·메틸아이소티아졸리논(MIT) 성분으로, 옥시 제품은 폴리헥사메틸렌구아니딘(PHMG) 등을 원료로 제조됐다. 지난 1월 2심은 “제조업자들은 영업비밀이라는 이유로 소비자에게 성분을 공개하지 않았다. 각 제품의 기여율을 일일이 밝혀내는 게 불가능하다”며 이들의 공범 관계를 인정했다.
반면 대법원은 “(각 제품은) 주원료 성분, 체내 분해성 등이 전혀 다르고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활용 또는 응용해 개발·출시됐다고 보기도 어렵다”고 밝혔다. 이어 “소비자가 주원료 차이를 알고 구매하기 어려웠다는 점 등을 이유로 공동정범을 인정하면 현대사회에서 상품 제조·판매자들에 대한 공동정범 범위가 무한정 확장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번 판결이 SK케미칼 측 살균제의 유해성을 부정하거나 홍 전 대표 등에게 무죄를 선고해야 한다는 취지는 아니다. 다만 공범 성립 여부는 공소시효와 연계돼 있다. 가습기 살균제 사건은 2011년 불거졌는데 검찰은 홍 전 대표 등을 2019년 기소했다. 업무상과실치사죄 공소시효는 7년이다. 검찰은 공범이 기소되면 공소시효가 중단되는 형사소송법을 근거로 옥시 측과 SK케미칼 등이 공범이고 공소시효도 살아 있다고 봤다. 하지만 공범 관계가 인정되지 않으면 일부 범행은 시효가 지나 면소 판단될 가능성이 있다. 법원 관계자는 “공범 성립이 어려우므로 이번 사건 가습기 살균제만으로 피해자들의 사망·상해 사이 인과관계가 있는지를 파기환송심에서 더 심리할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시민단체 환경보건시민센터와 피해자 측은 기자회견을 열고 “기업 측이 범인이 아니라면 누가 죽였고 누가 범인이란 말이냐”고 반발했다. 기업들은 판결을 존중한다는 원론적 입장을 냈다. SK케미칼은 “피해자분들의 고충이 오래 지속되고 있는 상황에 대해 죄송스러운 심정”이라며 “피해 회복 노력을 지속하겠다”고 말했다. 애경 관계자는 “가습기 살균제 문제가 해결되고 피해자 구제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했다.
양한주 이가현 기자 1wee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