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 축구로 연고지 이전 더비 잡아야죠”

입력 2024-12-30 03:22 수정 2024-12-30 03:22
유병훈 FC안양 감독이 지난 19일 경기도 안양종합운동장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안양=윤웅 기자

‘당당한 감독 되기’

2024시즌을 앞두고 FC안양의 지휘봉을 쥔 ‘초보 사령탑’ 유병훈(48) 감독의 올 시즌 목표였다. 지도자 경력을 밟아온 지 13년 만에 달게 된 감독 직함은 영광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론 어색하고 또 무겁게 느껴졌다. 선수단 첫 미팅 자리에서 발표할 프레젠테이션 맨 앞장에 자신의 목표를 이렇게 적어 넣으며 그는 다짐했다. 선수단에도, 팬들에게도,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게도 ‘당당한 감독’이 되겠노라고.

지난 시즌 팀 성적은 6위. 유 감독이 2021년 안양의 코칭 스태프로 재합류한 이래 가장 낮은 순위였다. 반등이 절실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많은 것을 바라기엔 전망이 밝지 않았다. 전력에 큰 변화가 없는 데다, K리그 ‘전통 강호’ 수원 삼성까지 강등돼 2부 리그 경쟁이 더 치열해진 상황이었다. ‘플레이오프 진출’이라는 다소 현실적인 목표를 내걸면서도 유 감독은 “시즌 초반만 해도 정말 막막했다”고 털어놨다.

시작은 미약했으나, 안양의 2024시즌 끝은 어느 때보다 창대했다. 1년 전에 잡은 목표치는 훌쩍 뛰어넘었다. 창단 최초로 리그 우승을 이뤄 플레이오프를 치를 필요도 없이 1부 리그에 직행했다. 올해의 감독상, 최우수선수(MVP), 베스트11 등 각종 상패도 뒤따랐다.

팀 역사를 돌아보면 ‘승격’의 의미는 더욱 남다르다. FC안양은 2004년 LG치타스가 연고지를 서울로 옮긴 후 지역 축구팀을 잃은 안양 팬들의 염원을 모아 만든 시민구단이다. 2013년 팀을 창단한 후 11년 만에 1부 리그로 향하면서 오랜 설움을 푼 셈이다. 찬란했던 2024시즌을 뒤로하고, 새 시즌 준비에 한창인 유 감독을 지난 19일 경기도 안양종합운동장에서 만났다.

2024시즌의 안양… 위기는 많았다

순위표만 봤을 때 올 시즌 안양엔 이렇다 할 위기가 없어 보인다. 개막 후 2위 아래로 떨어진 적이 없었고, 시즌 초중반인 6월부턴 1위를 쭉 유지했다. 그러나 유 감독은 한시도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그간 늘 마지막 한 끗이 부족해 승격을 놓쳐왔기 때문이다. 유 감독은 “3라운드 로빈이 다 돌 때까지도 주변의 의심스런 시선을 의식해야 했다”며 “실제로 순위는 계속 1위였지만 2위와 승점 차가 2로 좁혀졌다가 다시 7로 벌어지기도 하고 우여곡절이 많았다”고 짚었다.

세부 지표를 들여다보면 유 감독의 노고가 여실히 드러난다. 가장 큰 변화는 실점 수다. 2023시즌 51개의 실점을 기록했던 안양은 올 시즌 이를 36개로 대폭 줄였다. 35개의 실점을 남긴 수원에 이어 최소 실점 2위에 해당하는 기록이었다. 수비수 출신으로 안정적인 수비가 팀을 더 단단히 만든다는 것을 알았던 유 감독은 시즌 초반 공격수들의 수비 가담률을 높여 뒷문을 잠갔다.

시즌 막바지엔 방향을 바꿨다. 30대 이상의 베테랑 선수들이 많은 안양의 스쿼드에선 자칫 선수들의 힘이 빠질 수 있어서였다. 유 감독은 “공격수들의 수비적 헌신이 정말 많았는데, 실점이 줄어들고 안정을 기할 수 있는 건 좋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체력이 부쳐 자연히 득점력이 약해졌다”며 “공수 접점을 찾기 위해 3라운드 로빈부터는 라인을 끌어올렸다”고 말했다.

경기장 밖에서의 위기도 있었다. 곁을 지켰던 이들이 줄줄이 암에 걸리며 마음고생을 했다. 시즌 막판엔 노상래 통역 겸 매니저가 갑상샘암 투병 사실을 밝혔고, 승격 전날엔 아내가 같은 병을 진단받았다. 그러나 이들은 투병 중에도 안양의 우승 도전에 끝까지 함께했다. 노 매니저는 수술 일정을 시즌 후로 미뤘고, 아내 역시 안양의 승격이 확정된 부천전에 경기장을 찾아 남편을 응원했다. 유 감독은 “미안하고 감사한 마음을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며 고개 숙였다.

팀 컬러는 ‘낭만’
유병훈 감독이 국민일보와 인터뷰하는 모습. 안양=윤웅 기자

유 감독은 ‘부드러운 리더십’을 넘어 ‘공감의 리더십’을 지향한다. 그에겐 경기 후 꼭 지키는 루틴이 하나 있다. 종료를 알리는 휘슬이 울리면 가장 먼저 경기에 출전하지 못한 벤치 멤버들을 찾아 선수 한 명 한 명 안아준다. 자신 역시 선수 시절 빛을 보지 못했기에 그라운드를 밟지 못한 그들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아서다.

“저도 프로 선수 시절 대부분의 세월을 후보로 지냈단 말이에요. 10년간 출전한 경기가 86경기밖에 안 되죠. 그래서 그 선수들의 마음을 잘 알아요. 엄청 뛰고 싶다가도 그 시기가 길어지면 다른 팀에 가고 싶어지거든요. 90분 내내 감독이 불러주길 기다리는데 얼마나 마음이 아프겠어요. 그래도 ‘그런 마음을 참는 것도 언젠가는 도움이 되더라’고 전해주고 싶어서 꽤 오래 안아요.”

주전 선수들에겐 각자의 강점을 알려주고 목표 의식을 심어주려 했다. “경기 중반에 투입되어도 선수들이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고 뛰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유 감독은 “시즌 개막 전 선수 한 명씩 면담해서 자신의 강점이 뭔지 묻고 그걸 살려주려 했다”며 “아무리 좋은 전술이라 해도 선수들에 안 맞으면 무용지물이라 팀에 맞는 옷을 입히려 했다”고 설명했다.

공감의 리더십이 통한 걸까. 선수들도 자발적으로 팀을 위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선수들은 주장 이창용을 필두로 수시로 비디오 미팅을 진행하며 약점을 보완했다. 선수들끼리 소통하며 감독의 지시를 얼마나 잘 실현하고 있는지 파악하기 위함이었다. 이 미팅은 이창용이 부상으로 이탈한 후에도 고참 선수들이 바통을 이어받아 꾸준히 진행됐다.

유 감독은 “선수들이 팀 미팅 외에 별도로 시간을 내기 어려웠을 텐데 참 감사한 일”이라며 “팬들이 안양의 팀 컬러로 ‘낭만’을 꼽곤 하는데 이런 걸 보면 맞는 것 같다. 안양은 전체적으로 따뜻하고 정이 있는 팀이라고 느낀다”고 웃어 보였다.

‘연고 이전 더비’ 잡으러 ‘좀비 축구’가 간다

“한 번은 이겨야죠. 그 더비를 위해서 이 팀이 창단된 건데요.”

1부 리그에서의 새 시즌을 앞두고 안양이 마주한 가장 큰 키워드는 ‘연고지 이전 더비’다. FC서울과의 맞대결을 기다리는 팬들을 위해 유 감독은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다.

올 시즌 안양은 중원을 거친 빠른 공수 전환을 골자로 한 ‘꽃봉오리 축구’를 추구했다. 유 감독은 “공격 전개만 놓고 보면 전술은 60% 정도 실현된 것 같다”며 “내년엔 여기에 측면 자원을 더 활용해볼 생각”이라고 밝혔다. 시즌을 마치자마자 공격수 모따, 미드필더 에두아르도를 영입하면서 전술 선택지가 더 넓어지기도 했다.

전술에 완성도를 더하면서 동시에 조직력과 정신력을 갖춘 ‘좀비 축구’를 보여주려 한다. 유 감독은 “전력 차이가 큰 만큼 생존 경쟁을 하게 될 수도 있지만 쉽게 죽지는 않겠다”며 “일단 6강 안에 드는 게 목표다. 향후 1부 우승 도전을 위한 밑돌을 놓겠다”고 밝혔다.

감독 개인적으로는 사령탑 간 지략 대결에 대한 기대가 크다. 유 감독은 “김기동, 이정효 감독 등 전술적인 특색이 있는 국내 최고 리그의 감독들과 맞붙을 수 있어 영광”이라며 “안양의 전술이 통하지 않을 때 또 다 같이 돌파구를 찾아 나갈 텐데, 그 과정도 기대가 된다”고 덧붙였다.

안양=이누리 기자 nur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