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만사] 도움이 되는 ‘유니버스’

입력 2024-12-27 00:32

“이젠 환자의 의지가 중요하다고 했어요. 그 의지라는 게 어디서 오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 어쩌면, 그 의지라는 게 혼자만의 것은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요?”

중환자실에 누운 연인 앞에서 흐느끼는 지영(설현)에게 간호사 영지(박보영)가 말한다. 이곳 환자들은 대부분 의식이 없다. 의식이 없는데, 의지는 어떻게 생기는 것일까.

강풀 작가의 동명 웹툰을 원작으로 한 시리즈물 ‘조명가게’가 이달 초 디즈니플러스에서 공개됐다. 드라마는 죽음과 삶의 경계에 있는 인물들이 의식 또는 의지를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다. 최근 만난 강풀은 “작은 교회 목사였던 아버지가 아픈 교인들을 위해 병원에 기도하러 갈 때 따라가곤 했다”며 “그때의 경험과 ‘빛을 보았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다’는 임사 체험자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만들게 됐다”고 말했다. 사후세계를 옆 동네처럼 구현하고 인간 의식을 조명으로 표현한 아이디어가 돋보인다. 그 상상력과 메시지가 해외 시청자들에게도 통했는지 드라마는 26일 플릭스패트롤 기준 디즈니플러스 TV쇼 부문에서 전 세계 3위를 유지하고 있다.

창작물의 배경이나 등장인물이 서로 관계성을 가질 때 ‘유니버스(세계관)’라는 말이 종종 쓰인다. 역시 동명의 만화를 원작으로 한 시리즈물 ‘무빙’으로도 호평받은 강풀의 작품들은 ‘강풀 유니버스’로 불리며 웹툰에 이어 드라마 팬덤을 구축했다. 강풀의 세계관을 관통하는 건 평범한 사람들을 그리는 따뜻한 시선이다. 어떤 인물과 사연도 그의 작품에선 소위 ‘병풍’ 역할에 머무르지 않는다. 더 중요한 사람도, 덜 중요한 사람도 없다. ‘조명가게’ 역시 주연과 조연 구분 없이 캐릭터 각각의 서사에 공을 들였다. 강풀은 “내가 만든 모든 캐릭터가 (사고사가 아닌) 자연사하는 게 소원이다. 그들을 지키기 위해 ‘무빙’의 히어로들도 만든 것”이라며 인물들에 대한 애정을 표현했다.

숏폼 형식에 ‘절여져’ 있는 요즘 시청자들에게 ‘조명가게’의 첫인상은 불친절하다. 각 인물의 서사가 쌓이고 이들이 하나의 사건을 통해 서로 거미줄처럼 연결된 후 본격적으로 드라마가 시작된다. 조감도가 보인 뒤에야 묵직한 무언가를 느낄 수 있다. 조명가게 주인 원영을 연기한 배우 주지훈은 작품의 특징을 “판타지지만 땅에 붙여놓은 이야기다. 시간이 아닌 인물이 기준이 되는 일종의 멀티버스”라며 “인물들을 하나의 선상에 두고 화각을 달리하며 드라마가 전개된다. 부감(俯瞰)으로 보면 모두가 연결돼 있다”고 표현했다.

어떤 작품은 한없이 잔인한 방식으로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어떤 작품은 비현실적인 장치들로 현실을 잠시 잊게 한다. ‘조명가게’는 그중 어디에도 해당되지 않는다. 상상인 듯 현실인 듯 만들어진 공간 속에서 “어디나 사람 사는 세상 아니겠느냐”는 대사가 반복된다. 살아 있는 존재들은 서로 어떻게든 영향을 미친다. 내 의지인 듯 보이지만 내 의지만으론 불가능한 일들이 존재한다. 드라마 속에서 자신의 힘으로 조명가게를 찾아간 사람도 있지만 누군가의 기도와 희생으로 비로소 밝은 골목에 들어선 사람도 있듯이.

살아가다 보면 때로 나 자신이 주인공이 아닌 단역으로 생각될 때가 있다. 이런 현실에서 사람을 향하는 ‘강풀 유니버스’의 온기는 강력하다. 더 이상 만날 수 없게 된 누군가가 우리 동네와 비슷한 곳에서 소소한 일상을 이어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 누군가 지금도 빛을 향해 분투하고 있을 거란 상상은 위로가 된다. 한 해를 이런 작품으로 마무리할 수 있어 다행스럽다. 길을 잃었다고 생각하는 많은 이들이 자신만의 빛을 찾아 나아갈 수 있는 새해가 되기를 소망한다.

임세정 문화체육부 차장 fish813@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