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 강남스타일, BTS, 영화 기생충 등 일과성 이벤트들에 머물렀던 세계의 관심이 이제 한국문화 전반으로 확대되고 있다. K컬처로 대변되는 국내외의 다양한 사회현상들, 그리고 그들의 명과 암을 사회과학적으로 관찰하고 반추해 봄으로써 한국문화의 본성을 재조명해본다.
아마 영화 ‘친절한 금자씨’부터였던 것 같다. 무자비하리만큼 후련한 복수를 허락하는 완벽한 악인의 등장. 사치를 위해 유괴와 살인을 반복하고, 어린 딸아이를 볼모로 금자 씨에게 자신이 저지른 죄의 대가를 치르게 한 악마. 외딴 폐교에서 유가족의 즉결심판이 이뤄지는 순간조차 참회의 눈물이나 사죄의 말 따위는 없다. 감독은 이 악당에게 이해나 동정, 용서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이들을 둘러싼 사회와 법적 구조 역시 비정하게 묘사된다. 그래야만 선한 피해자들의 절대적 폭력이 허용되며, 관객은 그 과정을 지켜보며 간접적이나마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카타르시스의 크기는 악당에 대한 분노와 ‘참교육’ 과정의 치밀성, 직접성, 잔인성 등에 비례해 커진다. 영화 ‘아저씨’나 ‘범죄도시’도 유사한 플롯으로 억울한 일상을 살아가는 서민들에게 시원함을 선사한다. 절대 악인에 대한 절대 응징. 우리가 이러한 카타르시스를 직접 체험해 볼 수 있는 계기는 많지 않다. 평상시 나에게 습관적으로 막말하거나 업적을 가로채던 얄미운 직장 상사에게 사표를 던지며 그간 쌓여왔던 감정을 빠짐없이 또박또박 토해내는 정도. 물론 이마저도 흔한 일은 아니다. 잠시의 후련함과 맞바꿔야 할 현실의 안온(安穩)함이 소중하기 때문이다.
영화와 현실 사이에 존재하며 우리에게 중박의 카타르시스를 주는 장치가 바로 캠페인이다. 작게는 불우이웃 돕기에서 기아, 공중보건, 야생동식물 보호, 환경, 평등, 정의 등 인류가 직면한 더 웅장한 스케일의 국제문제 해결을 위해 기부나 자원봉사 등 다양한 방식으로 참여할 수 있다. 대개 캠페인의 일부가 되어 행동했다는 사실 자체 혹은 가시적인 성과가 참여자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주는데, 이를 극대화하는 미디어적 장치가 위에서 언급했던 영상 플롯과 유사하다. 여러 국제구호 단체의 홍보영상에서는 대게 정치적 불안으로 식수조차 없는 곳에서 몸져누운 부모와 어린 동생을 돌보며 어렵게 하루하루를 이어가는 아이, 이들에 대한 정치지도자와 국제사회의 무관심이 부각된다. 마지막은 항상 전화번호와 후원 계좌, 월 기부액, 그리고 그만큼의 도움으로도 이들의 삶이 충분히 나아질 수 있음에 대한 호소로 끝난다.
여느 복수극처럼, 이러한 캠페인 영상에서는 불운한 이들의 처절한 삶의 단편과 이에 무관심한 국제사회가 마치 피해자와 가해자처럼 묘사되며, 이를 지켜보는 시청자의 목구멍에는 어느덧 삼키기 힘든 큰 ‘고구마’ 한 개가 자라난다. 복수극에서는 ‘사이다’ 역할을 하는 주인공의 응징을 그저 기다려야 하지만, 현실에서는 시청자 자신이 기부 참여를 통해 스스로 사이다가 될 수 있다. 이 고구마는 처음 동정이나 슬픔, 미안함 등이 얽혀 만들어지지만, 여기에 분노가 섞일 때 특히 강한 목멤과 갈증을 일으킨다. 분노의 정점에는 인류의 비정함에 대한 의문이 자리한다. “도대체 왜?”
미안함에서 출발한 행동은 힘이 약하다. 기부 참여를 통해 상대적으로 무탈한 자신의 삶에 대한 죄의식이 덜어지면 곧 사라진다. 이에 비해 분노는 한 사람의 인생 경로를 바꿀 만큼 강하고 지속적인 동기가 되곤 한다. 그린피스(Green Peace) 행동대원들의 결기(決起)는 무너져가는 지구환경에 대한 미안함이나 슬픔이 아니라, 이를 해결하려 더 적극적으로 노력하지 않고 있는 국제사회와 무심한 인류에 대한 분노에서 발원한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대부분의 전략 커뮤니케이션 교과서에서는 ‘이기는’ 캠페인을 위해 반드시 타깃의 분노를 자극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분노는 거의 항상 이를 해소하기 위한 액션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분노는 다른 감정들과 달리 이성적 판단을 필요로 하며 그래서 ‘이성적 감정(reasoned emotion)’이란 별명이 늘 따라다닌다. 우리의 행동은 물론 자유의지에 의해서도 이루어지지만 대게 관계적 규범(relational norm)이라는 테두리에 갇혀있다. 어떤 말을 할 수 있는지, 해서는 안 되는지에 대한 룰은 대부분 관계에 이미 내재되어 있고, 이를 따름으로써 관계가 유지된다. 하지만 가끔 이러한 룰이 깨질 때가 있다. 그것이 단순한 실수였거나 긍정적 의미로 시도된 경우, 관계의 회복이나 격상이 가능지만, 부정적이면서도 고의적인 규칙 위반은 곧 상대방의 분노로 이어진다. 직장 상사가 오늘 당신에게 야근을 지시한다고 해서 분노할 일은 아니다. 짜증이 나긴 해도 역할 범위를 벗어난 언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집은 언제 갈 거냐’는 질문이나 ‘주일에 교회를 다녀보라’는 말은 걱정이나 권유 따위로 들리지 않는다. 주어진 관계의 테두리를 ‘명백히’ 벗어난, 정당화하기 어려운 간섭이기 때문이다. ‘네가 도대체 뭔데?’로 시작하는 분노가 당연한 반응이다.
‘명백히’라는 평범한 단어에 필자가 굳이 방점을 찍은 이유가 궁금할 것이다. 그렇다. 분노는 상대방의 행동이 명백한 규칙 위반일 때에라야 경험할 수 있는 감정이다. 확실치 않다면 그에 대한 응징이 정당성을 잃기 때문이다. 즉, 흑과 백, 명과 암의 대조가 뚜렷할 때 우리는 분노를 경험하게 되며, 그 뚜렷함이 누구의 눈에도 선명하게 나타날 때 비로소 공분(公憤)으로 발전한다. 필시 우리의 현실은 흑백이 적당히 어우러진 회색. 여기엔 절대 선이나 절대 악이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극도의 분노가 발생하는 경우는 우리가 타인과의 관계를 스스로 재구성했거나 누군가가 나름의 의도를 가지고 현실을 재가공해 우리 앞에 펼쳐 놓았을 때일 확률이 높다. 훌륭한 스토리텔러나 커뮤니케이션 전략가에게 회색의 정물화를 흑백으로 분리된 추상화로 바꿀 줄 아는 능력이 요구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2006년 영국 환경단체 ‘지구의 친구들(Friends of the Earth)’이 기획한 영상 ‘대담한 요청(the Big Ask)’은 성공적인 캠페인이란 무릇 ‘공분(公憤)의 페스티벌’이어야 함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상승하는 지구의 온도와 관련 통계치는 어린아이들의 낙서와 매스게임으로 해변 모래사장 위에 그려지고 그사이 바닷물은 점점 차올라 아이들이 만든 모래성을 덮친다. 검은 정장 차림에 서류 가방을 든 남성(영국 정부)은 이를 저 높은 등대 위에서 무심히 내려다볼 뿐 해결하려 뛰어들지 않는다. 영상은 강렬한 록 음악에 맞춰 그에게 손가락질하며 ‘당장 행동하라!(Act Now!)’고 외치는 대중을 비추며 끝이 난다. 이들이 목표하던 대로, 2008년 영국 기후변화법(UK Climate Change Act)은 의회를 통과하며, 최초로 구체적 탄소배출 감축목표를 강제하는 법적 수단이 된다. 그토록 갈망하던 법률이 제정되긴 하였으나, 이를 실천하기 위한 예산확보와 정부부처의 의지, 비용 대비 실효성 등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견이 분분한 상황이다. 최근 파리기후조약도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계로부터 이유 있는 탈퇴를 목전에 두고 있다. 그렇다면 이 캠페인은 복잡다단한 회색빛 기후 현실을 흑백으로 단순화하여 대중을 선동해 이뤄낸 ‘무의미한 성공’ 아닐까.
지금 한국에서는 공분(公憤)의 페스티벌이 매일 활기를 더해가고 있다. 비슷한 경험이 있어 그런지 이번엔 질서 정연한 느낌마저 든다. 외신은 이를 극찬한다. 성숙한 민주주의와 시민의식, 흥이 넘치면서도 차분한 시위문화 등 이유도 여러 가지. 하지만 우리는 본래 한(恨)과 흥(興)의 민족 아니었던가. 우중충하던 잿빛 세상이 순간 흑과 백의 대비가 명확한 카툰처럼 보이기 시작했다면, 낯 모르는 이들에 대한 분노에 가슴이 벅차오르기 시작했다면, 그것은 당신이 현실이 아닌 한 편의 복수극을 보고 있거나 잘 짜인 캠페인의 일부가 되었기 때문일 수 있다. 둘 다 특정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누군가가 재구성한 현실임을 기억하자. 그리고 스스로에게 물어보시라. 지금 그 분노의 원천은 무엇인지, 당신을 분노케 하는 자(者)는 누구인지.
겸 한국문화데이터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