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4년 배우 조승우가 타이틀롤을 맡은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가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초연부터 9번의 시즌을 거치는 동안 누적 관객 수 180만명을 돌파한 ‘지킬 앤 하이드’는 한국 뮤지컬 시장의 성장에 크게 기여한 작품 가운데 하나가 됐다.
선과 악, 인간의 이중성을 다룬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는 1886년 나온 영국 소설 ‘지킬박사와 하이드씨의 이상한 사건’을 원작으로 1990년 미국 텍사스주 휴스턴 초연 등을 거쳐 1997년 뉴욕 브로드웨이에 입성해 4년 가까이 공연됐다. 작곡과 공동 작사를 맡은 프랭크 와일드혼(66)은 1980년대 팝 음악계에서 휘트니 휴스턴 등 다양한 가수와 작업하다 이 작품으로 뮤지컬계에 데뷔했다. 와일드혼이 지금까지 음악을 담당한 뮤지컬은 약 40편 정도이며 일본과 한국에서 특히 인기가 있다. 그의 현재 아내는 일본 다카라즈카 가극단 출신 스타 배우 와오 요우카다.
‘지킬 앤 하이드’가 한국에서 큰 성공을 거둔 이후 와일드혼이 참여한 뮤지컬이 잇따라 국내 무대에 올랐다. ‘드라큘라’ ‘황태자 루돌프’ ‘데스노트’ 등 해외에서 선보였던 작품의 라이선스 공연부터 ‘천국의 눈물’ ‘마타하리’ ‘웃는 남자’ 등 한국 오리지널 창작까지 무려 15편이나 된다. 2010년대 중반부터는 매년 와일드혼이 작곡한 작품 4~6편이 국내 무대에 오르고 있다.
이번 겨울에는 11월 말부터 12월 초 사이에 올해 한국 초연 20주년을 맞은 ‘지킬 앤 하이드’(~내년 5월 18일 블루스퀘어)를 시작으로 ‘시라노’(~내년 2월 23일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 ‘마타하리’(~내년 3월 2일 LG아트센터)가 잇따라 개막한 가운데 내년 초 ‘웃는 남자’(1월 9일~3월 9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가 무대에 올라간다. 내년 1~2월엔 서울의 대형 공연장 4곳이 동시에 와일드혼의 작품을 공연하는 유례 없는 상황이 펼쳐지는 셈이다.
‘마타하리’ 공연차 한국을 찾은 와일드혼은 최근 서울 강남구 EMK뮤지컬컴퍼니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한국에서 내가 참여한 작품 4편이 연말연초에 한꺼번에 개막하는 것은 엄청난 행운”이라면서 “그저 한국 관객들에게 겸손한 마음으로 감사드린다”고 소감을 밝혔다.
와일드혼의 작품이 한국에서 유난히 인기 있는 것은 중독성 강한 멜로디, 절정에서의 고음 등 와일드혼의 작곡 스타일이 한국 관객의 취향에 맞기 때문이다. 한국어가 가진 정서와 그의 음악적 운율이 특별한 화학 작용을 일으키는 걸까. 그는 “음악은 사랑과 마찬가지로 경계가 없다. 내 작품이 전 세계에서 다양한 언어로 상연되고 있는데, 작곡에 담긴 열정이 언어를 넘어 전달되기 때문”이라면서 “내 작품들의 번역 또는 통역에 참여하신 분들에게 감사드린다”고 웃었다.
21세기 이후 한국 공연계의 주류로 성장한 뮤지컬은 이제 K팝, 웹툰, 드라마, 영화에 이어 새로운 K콘텐츠로 주목받고 있다. 지난 20년간 한국 뮤지컬을 지켜본 와일드혼의 감회도 남다를 수밖에 없다. 그는 “20년 전 ‘지킬 앤 하이드’의 첫 공연 이후 한국에 음악적 재능이 뛰어난 사람들이 많은 것에 늘 감탄했었다”면서 “특히 옥주현, 김준수, 홍광호, 박효신 등은 정말 세계적인 수준의 기량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내가 새로운 작업을 할 수 있도록 영감을 준다”고 피력했다.
장지영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