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태원의 메디컬 인사이드] ‘의·정 갈등’ 한해를 마무리하며

입력 2024-12-26 00:31

정부의 의대 정원 확대 정책으로 빚어진 의·정 갈등이 11개월째 이어지고 있다. 기자들도 해당 사안의 취재·보도에 1년 가까이 매달려 있다. 보건의료 이슈에 기자들이 이처럼 오래 붙잡힌 적은 과거 의약분업 사태나 황우석 논문조작 사건, 코로나19 대유행 정도였던 걸로 기억된다.

지금의 의·정 갈등은 결국 해를 넘기게 됐다. 현재 의료계와 정부 간 대화의 창은 모두 닫혀 있다. 일부 의사단체가 참여해 어렵사리 꾸려졌던 여야의정협의체는 공언했던 ‘성탄 선물’을 내놓지 못하고 해체됐다. 여기에 예상치 못한 비상계엄 사태와 탄핵 후폭풍으로 상황이 더 어렵게 됐다. 소통의 명맥을 유지해 오던 의료개혁특별위원회도 ‘파업 전공의 처단’ 계엄 포고령에 반발해 병원협회 등이 참여 중단을 선언하며 거의 개점휴업 상태다. 산하 전문위원회 차원에서 비급여·실손보험 개혁 등의 논의를 속개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으나 아직은 속단할 수 없다.

환자와 국민들의 피를 말렸던 한 해를 마무리하는 이 시점에 정부와 의료계는 스스로 지나온 길을 찬찬히 되돌아볼 필요가 있겠다. 자성과 성찰을 통해 꽉 막힌 현 상황의 돌파구를 찾거나 향후 맞닥뜨릴 큰 파고를 넘을 지혜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정부는 필수·지역의료 붕괴를 막고 초고령사회에 늘어날 의료 수요를 감안해 의사 수 대폭 확대가 필요하다는 명분을 내세워 ‘의대 2000명 증원’을 밀어붙였다. 의대 증원의 논리와 근거가 의료계를 전혀 설득시키지 못했는데도 역대 어떤 정부도 하지 못한 정책을 이뤄내겠다는 오기가 작동했다. ‘4·10 총선용’으로 기획된 의대 증원이라는 꼬리표가 붙었다. 하지만 아무리 방향이 옳고 명분이 좋아도 절차적 정당성에 설득력이 없으면 정책의 추동력을 얻기 어렵다. 정부는 의료계와의 형식적 소통과 일방적 정책 추진으로 작금의 상황에 단초를 제공했다는 비판을 면할 수 없다.

의료계는 사태 초창기 자만과 오판이 미숙한 대처를 불렀다. 과거 몇 차례 정부와 갈등 상황에서 파업 등 집단행동을 통해 정부를 무릎 꿇렸던 학습효과에 빠져 이번에도 이길 거라고 쉽게 생각했다. 여기에 온전한 신뢰를 얻지 못한 의사협회의 리더십도 의료계의 단일대오를 이끌어내지 못했다. 무엇보다 전공의와 의대생, 교수들의 집단행동에 대해 환자와 국민을 설득하는 데 실패했다.

이번 의·정 갈등은 아이러니하게도 대한민국 의료의 고질적인 문제점을 바로잡을, 두 번 다시 안 올 기회이기도 하다. 필수·지역의료의 만성적인 저수가, 상급종합병원의 전공의 의존, 비급여·실손보험의 팽창 등은 그간 개혁 필요성이 끊임없이 제기됐지만 지지부진했던 과제들이다. 이런 의료 개혁이 중단 없이 추진돼야 함은 물론이다.

의·정 갈등의 핵심인 의대 증원 문제도 지금까지와는 다른 해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의료계가 이미 끝나가는 2025년 의대 입시의 중단이나 인원 조정에 매달리는 것은 또 다른 혼란을 불러올 뿐이다. 그것보다는 내년 증원된 인원의 교육 부실을 막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고 2026년 이후 의대 증원 조정에서 해결책을 찾는 게 더 현실적이다.

지금의 의·정 갈등과 의료 공백이 지속되면 의료 시스템, 나아가 우리 사회 전체에 큰 쓰나미를 몰고 올 수 있다. 정부와 의료계 모두 이런 의료 파국에 대한 위기 의식은 공감하고 있다고 본다. 이번 비상계엄·탄핵 사태는 의·정 갈등 국면에 중요한 변곡점이다.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갈등을 풀 기회가 될 수 있고, 교착 상태가 더 길어질 수도 있다. 의·정 모두에 이제부터가 중요하다. 갈등 해결의 물꼬를 트려면 상대방의 태도 변화만을 고집하며 방관하기보단 스스로 먼저 변하려는 유연한 자세로 소통하며 결단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민태원 의학전문기자 twm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