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계엄의 알고리즘

입력 2024-12-28 00:38

돌이켜보면 자기 전에 그 영상을 누르지 말았어야 했나 싶다. 그 영상을 보고 나서 이 모든 일이 일어났나 싶어서다. 대통령이 이해 못할 말을 장황하게 떠들더니 느닷없이 비상계엄을 선포하는 그 이상한 영상 말이다. 별별 영상이 전시된 유튜브를 다루는 이 부서에서 수년째 일하면서도 그만큼 기괴한 건 여태 보지 못했다. 아마 많은 사람이 비슷한 기억을 가진 채 연말을, 또 새해를 맞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 모든 일은 시작부터가 유튜브를 둘러싼 거대한 우화였다. 영상 속 대통령이 계엄을 선포하더니 국회를 습격하는 군인들이 생중계됐고, 그 영상을 보고 국회 앞으로 달려온 시민들이 군인들을 막아서는 모습이 다시 유튜브에 올라왔다. 이윽고 담을 넘는 의원들의 영상에 이어 계엄 해제안이 가결된 뒤 대통령이 풀이 죽은 표정으로 계엄 해제를 인정하는 과정도 모두 유튜브를 거쳐 온 세상에 실시간으로 전달됐다.

대통령이 주장한 음모론은 이른바 극우 유튜버들의 주장과 다를 게 없었다. 이미 수차례 근거가 없다고 논박당한 이야기였지만 그는 별 신경 쓰지 않는 듯 보였다. 평소 신문도 방송뉴스도 보지 않는다고 의심받던 그가 가장 먼저 군인들을 보낸 곳 역시 상대 진영의 유력 시사 유튜버 사무실이었다. 심지어 그 역시 과거 부정선거론을 주장했던 이였다. 이 모든 과정이 유튜브를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의 연속이다.

유튜브는 본질적으로 최대한의 주목을 추구한다. 그 가장 신속한 수단이 알고리즘이다. 유튜브 세상에서 같은 시각과 같은 분노를 가진 이들은 알고리즘을 타고 한 채널로 빠르게 모인다. 모인 사람들은 같은 영상을 보며 서로의 닮음을 확인하고 안도한다. 많이 모일수록 안도감도 단단해지고, 자기확신은 커진다. 현실에서 틀린 얘기도 이곳에선 옳다. 모일수록 그들의 세상은 확장되긴커녕 한없이 좁고 편협해진다.

같은 맥락에서 음모론은 유튜브에 잘 들어맞는 옷이다. 던져놓는 이야기가 충격적일수록, 또 명쾌할수록 사람들은 더 열광하고 주목하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충분한 근거를 갖췄는지, 검증이 되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부당하다고 느끼지만 이해되지 않는 현실에 분노하는 이들에게 음모론은 속 시원한 설명을 제공한다. 대통령이라는 일국의 최고 엘리트조차 여기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걸 이번 사건은 극단적으로 보여줬다.

유튜브 시대는 이 어이없는 반동을 부추겼지만 다른 한편으론 막아내기도 했다. 사람들이 잠자리에 들기 전 어쩌면 우연히 틀었을 각자의 유튜브 화면 속에서 대통령의 계엄 선포와 군인들의 국회 진입은 생생히 중계됐다. 모든 상황이 실시간으로 전달돼 위기를 느낀 시민들이 직접 반응했다. 우리 역사에서 수차례 반복된 한밤중의 비밀스러운 쿠데타들과 달리 대낮처럼 온 세상이 다 지켜보고 있었다.

기술은 종종 의도치 않은 방향으로 사회를 바꿔낸다. 유튜브도 마찬가지다. 자기확신적 음모론에 빠진 대통령의 계엄령도, 그의 폭주를 막아낸 우리 사회의 모습도 이 기술을 들먹이지 않고선 해설하기 힘들다. 유튜브는 더 이상 영상을 단순히 전달하는 플랫폼이 아니라 사회 여론을 형성하거나 왜곡하고, 때에 따라 정치적 사건의 향방까지 좌우하는 도구이자 권력이다. 이번 일은 그 사실을 극적으로 드러냈기에 기념비적이다.

사람들은 이번 일을 오작동한 민주제를 뜯어고칠 동력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한다. 누군가는 중임제를, 내각제를 다시 꺼내든다. 하지만 우리가 여태 유지·보수해온 정치제도만 새로 고친다 해서 같은 일을 막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계엄이라는 초유의 사태까진 아니더라도 음모론의 창궐과 각 진영의 극단화, 그리고 이 흐름을 가속하는 유튜브의 존재는 지금의 세상 곳곳에서 볼 수 있는 모습이라서다.

물론 유튜브는 수단일 뿐 모든 것의 원인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 새 기술로 가속된 퇴보의 순환고리에서 벗어날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는 건 분명하다. 유튜브 속 음모론에 빠진 대통령을 끌어내는 게 전부가 아니라 우리조차 그의 모습을 닮아가지 않을 길을 찾아야 한다. 나아가 할 수 있다면 우리가 그날 밤 지켜봤듯 이 도구로써 보다 넓은 연대를 어떻게 이뤄낼지 고민해야 한다. 여의도에 울려퍼진 노랫말처럼, 우리는 ‘수많은 알 수 없는 길 속에서 희미한 빛이라도 쫓아가야’ 하니까 말이다.


조효석 영상센터 뉴미디어팀 기자 promen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