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 가토 아야메(21)씨는 지난 8월 한 K팝 보이그룹의 앨범을 30장이나 구입했다. 비용은 한화로 약 100만원. 대학생인 그는 아르바이트를 3개씩 하며 돈을 모았다고 한다. 엄청난 경제적 부담에도 음반을 대량 구입한 것은 팬사인회(팬싸) 응모권을 얻기 위해서였다. 그는 최근 국민일보와 가진 서면 인터뷰에서 “다음 달에도 비슷한 개수의 앨범을 구매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가토씨처럼 K팝 팬들이 같은 음반을 여러 장 구매하는 것은 국내 연예기획사들의 마케팅 전략에 휘둘리기 때문이다. 중복 구매를 유도하는 국내 연예기획사들의 행태는 해외 팬덤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최근엔 해외 아티스트가 K팝 시장의 잘못된 마케팅 전략을 모방하는 사례까지 생겨나고 있다. K팝 산업의 병폐가 글로벌 음반 시장으로 확산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K팝 상술에 멍드는 팬심
앨범 중복 구매 유도 마케팅은 크게 3가지 방식으로 나눠 설명할 수 있다. 전체 멤버 사진을 각각 개인 카드 형태로 만든 뒤 일부 카드만 무작위로 삽입해 놓는 ‘랜덤 포토카드’(이하 랜덤 포카), 가수와 직접 대화할 수 있는 ‘팬싸 응모권’, 앨범 표지만 다르게 하는 ‘앨범 종수 늘리기’다.
랜덤 포카는 앨범마다 2~3개씩 들어 있는 게 일반적이다. 그러나 각 앨범에 어떤 멤버의 사진이 들어 있는지 알 수 없어 팬들은 음반을 많이 구매한 뒤 확인하는 방식으로 포카를 모아야 한다. 자신이 좋아하는 멤버의 포카가 나올 때까지, 혹은 모든 멤버의 포카를 수집할 때까지 반복적으로 앨범을 사들이는 것이다.
표지만 다르게 한 앨범을 여러 장 발매하는 것도 팬들의 소장 욕구를 공략하는 K팝 업계의 일반적인 상술이다. 팬싸의 경우 기획사마다 당첨 방식과 기준을 공개하지 않아 팬들은 음반을 많이 구매하는 방식으로 ‘당첨 확률’을 높이려고 한다.
특히 해외 팬들은 영상통화로 진행되는 팬싸에도 몰려드는데, K팝 팬들이 모여 결성된 환경단체 ‘케이팝포플래닛’에 소속된 인도네시아 활동가 누하 이자투니사(28)씨는 “영상통화 팬싸에 참여하려고 앨범을 150장 구매한 사례도 있다”고 전했다. 그는 “앨범을 150장 사면 약 285만원”이라며 “인도네시아 사회 초년생이 이 돈을 마련하려면 최저임금을 기준으로 계산했을 때 하루 8시간씩 10개월 넘게 일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엑스(X·옛 트위터)에는 수백장의 앨범을 구매했다는 해외 팬의 게시물이 수시로 올라온다. 심지어 한 중국 팬은 “8377장을 구매했다”며 음반 유통 사이트에 구매 확인서와 앨범 상자가 쌓인 사진을 공개하기도 했다.
이처럼 앨범 중복 구매를 조장하는 상술 탓에 해외 팬들을 타깃으로 하는 ‘중간업자’까지 활개치고 있다. 이들은 해외 팬들의 주문을 받아 앨범을 대신 구매한 뒤 랜덤 포카만 모아 따로 배송해주고 실물 앨범은 폐기한다.
이다연 케이팝포플래닛 활동가는 “해외 팬들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믿을 만한 중간상을 찾은 뒤 소정의 수고비를 지불하고 대리 구매와 폐기를 맡긴다”며 “얼마나 많은 앨범을 구매해야 팬싸에 당첨되는지에 대한 정보를 팬들끼리 돈을 주고 사고팔 때도 있다”고 전했다.
이제는 해외 뮤지션들도 모방
가요계에서 음반이 과잉 생산·판매되고 결국엔 상당수가 폐기물로 전락하는 행태가 나타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같은 음반을 여러 장 구매하는 사람이 늘면서 K팝 음반 판매량은 상승세가 뚜렷하다. 써클차트 상위 400위권 내 K팝 앨범의 지난해 1~11월 판매량도 약 1억1600만장에 달한다. 이 활동가는 “대부분 스트리밍으로 음악을 듣는 상황에서 음반 판매량이 증가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라고 꼬집었다.
해외 매체도 K팝 음반 시장의 기형적 행태에 주목하고 있다. 가령 미국 빌보드는 지난 6월 한 기사에서 “한국에서는 많은 팬이 CD 플레이어를 갖고 있지 않음에도 ‘복권 스타일’의 마케팅 전략 탓에 CD를 구매한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눈여겨봄 직한 부분은 이 같은 K팝 마케팅이 해외로도 확산될 조짐을 보인다는 것이다. 이 활동가는 “최근 미국 유명 래퍼 ‘메건 더 스탤리언’이 한국 걸그룹과 협업한 뒤 자신의 신보에 랜덤 포카를 선보여 ‘K팝 상술이 해외로 수출됐다’는 팬들의 자조 섞인 비판이 나오기도 했다”고 말했다. 음악 관련 단체인 ‘뮤직 서스테이너빌리티 얼라이언스’의 커트 랭어 상임이사는 지난해 11월 국회에서 열린 포럼에서 “올해 상반기 빌보드 차트 ‘톱10’ 앨범은 평균 22가지 버전으로 출시됐는데 이는 2010년대 K팝에서 시작된 관행”이라며 “K팝의 마케팅 관행이 상업적으로 성공하면서 음악산업이 완전히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차트 집계 방식을 바꾸는 등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예컨대 공신력 있는 차트들은 순위를 매길 때 이른바 ‘랜덤 구성물’이 있는 앨범은 불이익을 받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일부 기획사가 선보이는 ‘친환경 패키지’나 실물 음반이 없는 ‘디지털 앨범’에 대해서도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문제의 본질을 흐리는 그린워싱(친환경적인 방법인 것처럼 위장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랜덤 포카나 팬싸 응모권 같은 방식부터 사라지지 않는다면 문제 해결은 난망하다고 말한다. 하재근 대중문화평론가는 “꼼수 마케팅은 결국 K팝에 해로 돌아올 것”이라며 “기업들의 자정 노력이 필요하다”고 당부했다.
박은주 기자 박상희 박주원 인턴기자 wn1247@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