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진짜 꽝이야. 외롭고 짜증나고 미칠 것 같아. 여전히 슬프고 돈도 없어. 남들은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난 끝난 것 같아. 제발 2021년으로 그냥 넘어가면 안 될까?” 미국 여성그룹 애비뉴 비트가 2020년에 발표한 노래 ‘F2020(빌어먹을 2020)’의 가사인데, 제목과 가사의 연도를 2024로 바꿔도 무방하다. 4년 전에는 코로나19로 세상이 망가졌다면 올해 한국은 계엄으로 모든 게 엉망이 됐다.
옥스퍼드 사전 ‘올해의 단어’로 선정된 ‘뇌 썩음(brain rot)’도 한국 상황을 표현하는 데 딱 맞다. 음모론과 무속에 뇌가 썩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런 일을 구상하고 실행할 수 있을까. 집단적으로 뇌가 썩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런 일을 저지른 사람을 두둔하고 지키려 할 수 있을까.
한국이 단연 압도적으로 나쁘고 기괴하고 퇴행적인 상황이지만, 다른 잘사는 민주주의 국가들도 위기에 처해 있다. 최근 월스트리트저널은 “선진국 유권자들은 특히 불만이 많고, 인기 없는 지도자를 퇴출시킬 준비가 돼 있으며 집권 세력은 과감한 개혁을 하기가 더 어려워졌다”고 보도했다. 모닝컨설트가 25개 민주주의 국가를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자국 지도자에 대한 긍정 평가가 부정 평가보다 많은 나라는 스위스(56%)뿐이었다.
경제성장의 부진 속에 정부의 기능 부전은 결국 포퓰리스트와 반체제 성향 정치인이 발흥할 토양이 된다. 선진국이 자랑하던 자유민주주의의 형편이 말이 아니다. 비자유적 민주주의, 대중 독재(대중이 지지하는 독재)가 많은 곳에서 힘을 얻고 있다.
계엄과 탄핵 사태를 계기로 제왕적 대통령제를 끝내고 권력 분산 개헌을 하자는 얘기가 많다. 실현되기도 어렵겠지만 대통령 4년 중임제나 의원내각제, 이원집정부제로 바꾼다고 딱히 좋아지거나 문제가 해결될 것 같지도 않다.
“민주주의가 중병을 앓고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지금 그대로의 민주주의도, 카리스마 있는 한 사람이나 광인에게 의존하는 전제 체제도 아니다. 민주주의의 다음 모습으로의 탈피가 필요하다.” 나리타 유스케 예일대 조교수가 ‘22세기 민주주의’라는 책에서 한 말이다. 그는 “빈사 상태의 민주주의를 몰아붙일 흑선을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느냐가 관건”이라고 했다. 1853년 일본 앞바다에 출현한 미 해군 함대를 가리키는 흑선(黑船·구로후네)은 갑자기 나타나 엄청난 충격을 주는 존재를 비유적으로 뜻하기도 한다.
나리타 교수가 제안한 흑선 아이디어는 ‘무의식 데이터 민주주의’다. 인터넷이나 CCTV가 포착하는 일상에서의 말과 표정, 신체 반응, 심박수 등 무의식적인 민의가 숨겨져 있는 각종 데이터를 수집한다. 자동화·기계화된 의사결정 알고리듬이 이렇게 수집된 데이터로부터 각 논점·이슈에 대한 의사를 도출해낸다. 미 국방부가 사용하는 팔란티어의 고담(Gotham) 시스템의 전방위적 확장판이라 할 수 있겠다. 고담은 위성 등 감시 장비를 통해 다른 나라 전투기·군함의 동향을 실시간 파악하고, 불규칙한 움직임이 나타나면 가능성 있는 시나리오를 예상해 군대가 취해야 할 행동의 우선순위를 추천한다.
무의식 데이터 민주주의에선 선거가 AI 알고리듬으로 대체된다. 정치인도 차츰 역할을 잃다가 고양이와 같은, 누구나 좋아하는 마스코트로 대체된다. 당장 도입하기 어려운 너무나 파격적인 주장이어서 책 제목에 ‘22세기’가 들어갔겠지만 저렇게 될 수만 있다면 최선이라고 본다. 선거와 정치인이 사라진 브랜뉴 민주주의 세상, 생각만 해도 좋지 않은가.
천지우 국제부장 mogu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