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년 뱀 이야기 품은 고흥, 매생이·생선구이 등 먹거리 다양

입력 2024-12-26 03:15
전남 고흥군 영남면 금사리 뱀 형상의 사도마을 앞 바다 가운데 개구리 모양의 와도 너머로 아침 해가 떠오르고 있다. 뱀이 개구리를 쫓아가는 모습의 지형은 먹을 것이 풍부한 곳으로 여겨졌다.

을사년(乙巳年) 새해가 일주일도 안 남았다. 내년은 ‘푸른 뱀의 해’다. 예로부터 뱀은 숭배와 질시를 동시에 받았다. 집과 재물을 지켜준다는 업구렁이는 떠받들어졌지만 인간을 해치려는 사악한 뱀은 미움을 샀다.

이런 이중적 믿음은 지명에도 고스란히 담겨 있다. 전국 지명 150만여개 가운데 208개가 뱀과 관련돼 있다. 지역별로 가장 많은 곳은 전남으로 41개다. 전남 고흥군 영남면 금사리의 사도는 충남 홍성군의 사성과 함께 ‘뱀이 개구리를 쫓아가는 모습’의 지형인 ‘장사추와형(長蛇追蛙形)’이라 해 먹을 것이 풍부한 곳으로 여겨졌다.

사도에는 임진왜란 때 전라좌수영 산하 고흥 지역 수군진을 관할했던 사도진이 있었고 첨사가 주재했다. 당시 수군 지휘체계는 수군절도사(수사), 첨절제사(첨사), 만호로 이뤄졌다. 첨사가 주재한 수군진은 지휘관 위치만큼 중요한 지역이었다. 방어와 적의 동태를 살필 수 있는 최적의 위치였기 때문이다.

사도진은 마을 뒷산이 뱀머리인 ‘사두(蛇頭)’처럼 생겼고, 마을 앞 건너편에서 개구리 형상을 한 ‘와도(蛙島)’를 넘보는 형태처럼 보여 ‘사두(蛇頭)’ 또는 사도(蛇渡)라 불렸다. 고흥에 위치한 3개 수군진 마지막 글자가 모두 섬이란 뜻을 지닌 ‘도(島)’를 쓰는데 이곳만 ‘건널 도’(渡)를 쓰는 게 색다르다.

사도진이 위치한 금사리는 고흥반도와 여수반도 사이의 내해인 여자만으로 진입하는 외적을 쉽게 방어할 수 있는 위치에 자리하고 있다.

사도진은 성종 7년 이전부터 설치 운영된 것으로 보인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사도진이 전라좌수영의 유일한 첨사진이었지만 중종 때 개편돼 방답진이 첨사진으로 설치되면서 좌수영 관할 내 2개의 첨사진이 운영됐다. 좌수영 관할 내 모든 만호진이 사도진에 편입돼 있어 전라좌수영 다음으로 중요한 수군진이었다.

이순신 장군과 사도진에 얽힌 사연도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인 1592년 2월 25일 전투준비태세 점검차 장군이 사도진 초도순시 당시를 기록한 ‘난중일기’에는 전투준비에 소홀한 사도진 군사들을 징계한 내용이 나온다.

사도진성은 성종 16년(1485년)에 계획돼 성종 22년(1491년)에 완성됐다. 성벽 둘레는 1400~1800척, 높이 13~15척으로 기록돼 있다. 사도진 시설물들을 기록한 ‘호남읍지’에는 동문1칸, 서문 1칸, 남문 1칸, 객사 4칸, 동헌 3칸, 아사 7칸, 군기고 6칸, 우물 2곳, 일선창 4칸, 이선창 3칸이 있다. 현재 대부분 사라지고 북쪽벽 중에서도 일부 구간에서만 잔존 유적을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

고흥에서 뱀과 관련된 또 다른 곳은 뱀골재다. 고흥군 동강면에서 보성군 벌교읍을 향해 굽이쳐 내리는 고개로, 사동치(蛇洞峙)로도 불렸다. 길이 800m가 채 되지 않는 구불구불한 고갯길은 뱀의 모양을 닮았다. 조정래 작가는 소설 ‘태백산맥’에서 ‘구불거림은 행인들의 짜증을 일으킬 정도로 심했다’고 했다. 1919년 조선총독부가 전국 지명 등을 조사해 만든 ‘조선지지자료’에도 같은 설명이 담겼다.

고흥에서 보성으로 이어지는 뱀골재 일대.

뱀골재에는 고흥을 드나드는 수많은 이들 가운데 부정한 사람을 용서하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스며 있다. 원한으로 세상을 떠난 여인의 환생인 뱀은 이 길에서 부정과 죄악을 단죄하는 지혜로움의 존재였다.

조선시대 고흥에서 과거를 보기 위해 한양에 가기 위해서는 뱀골재를 넘어야 했다. 날이 맑은 날 모퉁이에서 아름다운 여인이 나타나 길을 안내해 주면 무사히 지나갈 수 있었고,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재앙이 일어나 저주를 받는다는 고개였다. 청운의 꿈을 안은 한 선비가 과거를 보기 위해 뱀골재를 넘을 때 아름다운 여인이 길을 안내해 무사히 고개를 넘고 과거에 급제했다고 한다. 그러나 패륜을 저지른 부도덕한 선비는 길바닥의 큰 뱀을 피해 다른 길로 가서 과거를 보았지만 떨어지고 말았다.

뱀과 연관된 고흥 출신 인물은 동양화가 천경자(1924~2015) 화백이다. 그의 그림에는 여자·뱀·꽃 3가지 요소가 상징적으로 표현됐다. 탄생 100주년 기념 특별전이 오는 31일까지 고흥분청문화박물관, 고흥아트센터, 남포미술관 등에서 열리고 있다.

남열해돋이해수욕장 뒤 고흥우주발사전망대.

고흥은 나로우주센터가 있는 우주의 고장이다. 멀리서 우주 발사 장면을 볼 수 있는 고흥우주발사전망대는 새해 일출 명소로도 유명하다. 전망대의 화려한 LED 조명과 해발 150m 높이의 7층 회전전망대에서 감상하는 일출은 벅찬 감동을 안겨준다. 인근 남열해돋이해수욕장도 빼놓을 수 없다.

중산마을과 우도 사이 바닷길 옆 레인보우교.

해넘이는 중산 일대다. 지난 4월 중산과 우도 바닷길 사이에는 1.32㎞로 국내 최장 연륙 인도교인 레인보우교(무지개다리)가 완공돼 관광객의 발걸음을 이끌고 있다. 하루 2번 바닷길이 열릴 때만 갈 수 있었던 곳을 하루에도 몇 번씩 이동할 수 있게 해줬다. 인도교는 난간과 바닥이 모두 무지개색으로 칠해져 있다. 무지개색에는 희망과 행운이 담겨 있다.

여행메모
분청문화박물관 연말까지 무료… 매생이·생선구이 등 먹거리 다양

고흥아트센터에서 진행 중인 ‘환상 여행’전에서 천경자 화백의 대표작들로 구성된 미디어아트를 감상할 수 있다.

고흥분청문화박물관은 어른 기준 입장료 2000원을 받지만 천경자 화백 탄생 100주년 기념전이 열리는 동안 무료로 운영된다. 매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문을 열고, 월요일은 휴관이다. 고흥아트센터 역시 무료다. 탱고가 흐르는 황혼, 만선, 화혼, 굴비를 든 남자, 길례언니Ⅱ 등을 만날 수 있다.

겨울 고흥은 바다의 선물을 내놓는다. 매생이는 고흥 바다의 정수를 담고 있는 대표적인 겨울 먹거리다. 매생이 떡국이나 칼국수는 겨울의 차가웠던 순간들을 하나둘 녹아내리게 한다. 유자 향기 또한 고흥의 겨울을 채운다. 남도의 햇살을 가득 담고 자라 상큼하면서도 깊은 향을 지닌다.

사도마을은 굴의 주산지다. 고흥 굴로 젓을 담은 '진석화젓'은 예로부터 임금한테 진상한 음식으로 독특한 굴향기와 함께 고소한 풍미를 낸다. 고흥에서 먹거리로 읍내 생선구이 시장을 빼놓을 수 없다. 1915년에 세워진 오랜 역사의 전통시장 주변에 주차장이 새로 조성돼 편리하다.



고흥=글·사진 남호철 여행선임기자 hcna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