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님을 회장님으로 모셔야 할 것 같다는 이야기가 우스갯소리로만 들리지 않습니다.” 지난 19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주재로 국회에서 열린 상법 토론회에서 박일준 대한상공회의소 부회장이 한 말이다. 재계가 경영 환경을 둘러싼 법률 리스크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최근 통상임금 범위 확대 등 인건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사법부 판결이 속속 이어지면서 기업들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상법 개정안이나 ‘노란봉투법’(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개정안)처럼 야권 주도로 국회에서 입법을 추진하는 법안 통과를 막기 위한 경제단체의 움직임도 분주하다. 비상계엄발 탄핵 정국으로 들어서면서 거부권을 비롯한 정치권의 입법 관련 의사결정의 불확실성이 커졌고, 이 같은 분위기를 의식한 사법부도 입법부 눈치를 보며 중요한 판결을 지연하고 있다.
최근 사법부가 통상임금 관련 판례를 뒤집으면서 기업들의 인건비 부담은 더 커질 전망이다. 대법원은 지난 19일 현대자동차와 한화생명보험 전·현직 근로자가 회사를 상대로 낸 임금 청구 소송에서 11년 만에 기존 판례를 뒤집었다. 재직 중인 사람에게만 지급하는 등 일정한 조건을 달아 지급하던 정기상여금을 정기적·일률적으로 지급한다면 통상임금으로 봐야 한다는 취지다. 통상임금은 각종 수당과 퇴직금을 산정하는 기준으로 통상임금 범위가 늘어나면 총급여도 늘어난다.
지난 2013년 대법원 판결 이후 재직을 요건으로 하는 급여에는 통상임금 성격이 없다는 판례가 자리 잡고 있었다. 분위기가 반전된 건 지난 2018년이다. 현재 대법원에 계류 중인 세아베스틸 통상임금 소송 2심에서 재판부가 ‘재직자 조건’ 자체가 무효라고 판시하면서 기존 대법원 입장과 배치되는 첫 판결이 나왔다. 이것이 현대자동차·한화생명보험 대법원 판결로까지 이어진 것이다. 삼성화재(서울고법 계류), 한국유리(대법원 계류), 기술보증기금(대법원 계류) 등도 지난 19일 이번 대법원 통상임금 판례의 영향을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한국경영자총협회는 재직자 조건부 상여금이 통상임금에 포함되면 연간 6조7889억원의 추가 인건비 부담이 발생할 것으로 추산했다. 경총은 “이는 법리 변경으로 영향을 받는 기업 1년 치 당기순이익의 14.7%에 달하며 연간 9만2000명 이상을 고용할 수 있는 인건비에 해당한다”고 강조했다.
노동자 측의 압박은 바로 시작됐다. 전국금속노동조합 현대차 지부는 23일 사측에 통상임금 대법 판례 변경을 거론하며 통상임금 재협의를 요구했다. 문용문 현대차 지부장은 홍보문을 통해 “통상임금이 재정립된 만큼 임금체계 구조변화를 통해 조합원 권리를 높이겠다”면서 “법률 자문으로 판결문의 법적 의미를 분석하고 이를 바탕으로 전략 수립, 조합원 권리 보호를 진행할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사측이나 전문가들은 “기업들이 이번 판결로 증가하는 비용을 줄이기 위해 어떤 대응책을 마련하느냐에 따라 오히려 노동자들의 처우가 전보다 나빠질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기업들의 인건비 부담 증가로 이어질 수 있는 다른 쟁점에 관한 판례 변경도 예상된다. 대법원은 내년 중 성과급을 평균임금(퇴직금)에 반영해야 하는지에 대해 결론을 낼 예정이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 LG디스플레이, 현대화재해상보험 등이 관련 재판을 치르고 있다. 과거 대법원은 근로자에게 지급하는 경영성과급은 임금으로 볼 수 없다고 일관되게 판시했다. 하지만 지난 2018년 대법원이 공공기관 성과급을 평균임금에 포함해야 한다고 판례를 변경했고 민간기업들의 관련 소송이 줄을 잇고 있다. 현대해상의 경우 1·2심 모두 경영성과급을 평균임금에 포함해야 한다는 판결이 있었기 때문에 대법원에서도 같은 결론이 날 것이라는 게 법조계 중론이다. 김동욱 법무법인 세종 파트너변호사는 “기업의 부담이 많이 늘어나 제2의 통상임금 사태가 벌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국회의 입법을 두고도 재계는 속앓이하고 있다. 최근 야당이 개인 투자자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추진 중인 상법 개정안이 대표적이다.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을 회사에서 주주로 확대하는 것이 골자다. 기업들은 해당 규정을 명분으로 삼은 개인 투자자 및 행동주의 펀드의 소송 남발을 우려한다. 박 부회장은 “상법이 개정되면 관련 판례가 정립될 때까지 사회적, 경제적 혼란을 초래하고 결국 기업 경영을 법원에 맡기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또, 상법 개정은 배임 관련 고소·고발 남발로 이어질 우려가 있다는 게 재계의 주장이다.
정치권의 불확실성이 사법부 판결 지연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HD현대중공업은 하청 업체 근로자가 만든 노동조합과 단체교섭을 할 의무가 있는지를 두고 전국금속노조와 약 8년에 걸쳐 법정 다툼을 벌이고 있다. 1·2심에선 회사가 이겼지만 최근 비슷한 쟁점을 다룬 CJ대한통운 재판에서 하청 노조의 단체교섭권을 처음 인정한 것이 변수로 떠올랐다. 원청이 하청에 속한 노조와 단체교섭을 하도록 하는 것은 야당이 추진했고 윤석열 대통령이 거부권을 2번 행사한 바 있는 노란봉투법의 핵심 내용이다. 그러나 대통령 직무 정지로 추가 거부권 행사가 불투명하고 정권 교체 가능성이 높아져 다음 정권에서 노란봉투법의 입법 가능성도 커졌다. 법조계 관계자는 “사법부는 국회에 계류 중이지만 시행 가능성이 큰 노란봉투법 법안을 의식하고 있다”며 “입법 취지와 상충하는 결정을 주저하며 판결을 지연하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한 경제단체 관계자는 “기업 현장의 법적 안정성을 훼손하고 향후 소송 남발 등 혼란을 일으킬 것이 자명한 판결과 입법이 판을 치고 있다”며 “사법부나 입법부가 노사가 첨예하게 충돌하는 사안에 대해 갈등을 조정하진 못할망정 새로운 혼란을 유발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황민혁 기자 okj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