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화·애니·키네틱… 일탈 꿈꾸는 69세 작가의 ‘개념미술’

입력 2024-12-25 02:23
안규철 작가가 지난 11일 서울 용산구 이태원 아마도예술공간에서 ‘無爲自然’ 작품을 배경에 두고 서서 국민일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아마도예술공간 제공

2020년 8월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교수직에서 정년퇴직한 안규철(69) 작가가 2021년 국제갤러리 부산관 개인전 이후 3년 만에 개인전을 한다. 이번에는 두 곳에서 동시 개최한다. 8월 말 서울 서초구 반포동 스페이스 이수에서 개막한 개인전 ‘안규철의 질문들’을 하는 와중에 최근 서울 용산구 이태원의 대안공간 아마도예술공간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그는 2015년 국립현대미술관이 현대차 지원을 받아 중진 작가를 후원하는 프로젝트에 선정돼 장기 전시를 한 바 있다. 이불, 이수자, 양혜규, 정연두 등이 거쳐 간 현대차 시리즈 작가는 한국 미술계의 ‘톱 클래스’라는 이름표 같은 거다. 그런 그가 30, 40대가 주로 전시하는 아마도예술공간에서 개인전을 하니 적이 의아했다.

지난 11일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운영위원을 맡고 있는데 전시를 해보면 어떠냐는 제안을 받아 참여하게 됐다”며 쑥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서 “젊은 작가들이 관객으로 많이 온다. 그들과 교감할 수 있도록 30대 작가의 마음으로 준비했다”고 강조했다.

전시 제목은 ‘12명의 안규철’이다. 작가는 “한국 미술계에서는 작가가 일관된 세계를 구축해야 한다는 규범이 있다.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는 것에 대한 금기에 이의를 제기하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모두 신작”이라고 힘주는 목소리 톤에서는 뿌듯함이 묻어났다.

회화에서 애니메이션, 조각, 키네틱 아트까지 다양한 장르의 신작들이 숨바꼭질하듯 곳곳에 설치됐다. 이곳은 1970년대 불법 증축한 다세대 2층 집을 리모델링한 곳이라 안방과 부엌, 다락방, 창고 등 장소가 주는 맛도 있다. 안방 공간에는 추상화의 구성 요소인 점, 선, 면을 그린 회화가 걸려 있다. ‘점 연습’에는 2065, 2067 등 근미래의 연도가 적혀 있다. 숫자를 병기함으로써 추상적인 점인데도 상상력이 발동하며 서사를 생산한다. ‘선 연습’이라는 작품은 가로로 선을 그었는데 흔들리는 몸의 흔적을 담아 삐뚤빼뚤하다. 누구라도 “한 호흡에 단번에 선을 긋는다”는 단색화 대가 이우환에 딴지는 거는 작품임을 알 것이다. 주방이 있던 방에는 한자와 한글이 가훈처럼, 좌우명처럼 걸려 있다. 화려한 금박 글씨의 ‘無爲自然(무위자연)’은 글자가 뒤집혀 있다. 이처럼 작위적이라 ‘무위’의 추구와 엇박자를 낸다.

애니메이션 ‘걷는 사람’. 아마도예술공간 제공

애니메이션은 처음 도전했다고 했다. 한 사람이 걷는다. 같은 크기, 같은 동작이다. 그런데 주변의 풍경이 커지며 바뀌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 또 모자, 가방 등 익숙한 사물이 하늘로 날아가도 개의치 않고 계속 걷는다. 시대와의 불화 속에서도 진정한 자아를 찾으려는 작가의 철학을 보여주는 듯했다. 작가는 “파트릭 쥐스킨트의 동화 ‘좀머 씨 이야기’, 빔 밴더스의 영화 ‘파리 텍사스’ 등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했다.

텍스트 작품 ‘honesty'. 아마도예술공간 제공

인터뷰하는 내내 소설가, 영화감독, 안무가, 미술가 등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작가가 직접 연기자로 참여한 퍼포먼스 영상 ‘쓰러지는 의자’에서는 의자가 계속 넘어진다. 그걸 막아보려 작가가 의자에 앉지만 그조차 의자와 함께 넘어진다. 남자가 일으켜 세우는데도 여자는 계속 허물어지는 설정은 독일 출신 무용가이자 안무가 피나 바우쉬의 안무에서 영감을 얻었다. 1층의 벽감 같은 공간에는 ‘Honesty’(정직성)이라고 쓴 영어 패널이 묘비명처럼 설치돼 있다. 그는 “이 영어를 보면 미술계 사람이라면 개념미술가 박이소가 생각날 것”이라고 했다. 후배 박이소는 빌리 조엘의 ‘어니스티’의 노랫말을 ‘정직성 ∼정말 듣기 힘든 그 말’이라고 직역하고는 조악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작품을 내놓았는데, 2004년 50세로 세상을 떠났다.

키네틱 아트 ‘두 개의 의자’. 아마도예술공간 제공

하나의 원판 위에서 두 개의 의자가 각기 다른 방향으로 빙빙 회전하는 키네틱 아트 ‘두 개의 의자’는 현대 사회의 소외를, 미술관 안에 넣어 달라는 돌과 나를 꺼내 달라는 돌을 병치한 ‘두 개의 돌’은 누가 미술을 정하는가 등 미술관 제도에 대해 문제 제기한다.

작가는 “일관성 없고 줏대가 없는 작가를 던지듯 보여주고 싶었다”라고 했지만 이 모든 작업에서 개념미술가 안규철의 이미지가 일관되게 떠오른다. 안규철은 안규철이다. 스페이스 이수에서 하는 개인전 ‘안규철의 질문들’은 세상의 관습과 미술의 관습에 대해 작가가 던지는 질문들을 회화, 설치, 조각, 텍스트 등으로 구성했다. 스페이스 이수는 1월 3일까지, 아마도예술공간은 내년 1월 18일까지.

손영옥 미술전문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