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요환 목사의 새벽묵상] 칙령과 찬송

입력 2024-12-25 00:35

누가복음의 성탄 이야기는 독특합니다. 요셉과 마리아로부터 시작하지 않습니다. 마구간에서도 목자들 사이에서도 아닙니다. 오히려 먼 로마 제국의 권력 중심부에서 시작합니다. “그때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눅 2:1) 누가복음의 색다름은 마태복음과 비교할 때 더욱 분명합니다. 마태복음은 요셉의 꿈을 통해 요셉과 마리아를 베들레헴으로 인도합니다.(마 1:18~25) 반면에 누가복음은 정치적 선포를 통해 두 사람의 걸음을 베들레헴으로 이끕니다.

요셉과 그의 임신한 약혼녀 마리아를 강제적으로 움직이게 한 힘은 무엇일까요.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선포한 칙령입니다. 칙령이란 헬라어로 ‘도그마(dogma)’에 해당하는데 칙령 명령 결정 혹은 법령을 의미합니다. 개역개정 성경은 이 단어를 ‘영’으로 옮겼지만, 새번역 성경은 법적 효력을 가진 선언인 칙령으로 번역합니다. 어떤 단어로 번역하든, 도그마란 문맥상 구속력을 가진 결의를 포함합니다. 이것은 평화나 기쁨을 주지 않고 불쾌한 혼란을 일으킵니다.

신으로 숭배받던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권력과 군사력으로 수립한 로마의 평화(Pax Romana)를 강요하며, 강요된 평화의 대가로 세금을 거둘 목적으로 온 천하에 칙령을 내렸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누가복음의 저자가 마리아의 출산이 임박했음을 강조하는 이유일 것입니다. 임신 후반기에는 아무리 중요한 일이라 해도 장거리 여행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요셉과 마리아는 불합리하고 강요된 칙령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길을 나서야만 했습니다.

대한민국은 12월 3일 비상계엄령이라는 칙령으로 인해 불쾌한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주가의 폭락과 치솟는 환율은 경제의 어지러운 상태를 대변하고, 세계 주요 국가들 사이에서 대한민국 외교는 시험대에 올랐습니다. 계엄사태에 동원된 군인들이 호소하는 심적 괴로움은 국방에 대한 불안함을 느끼게 합니다. 이런 와중에 우리는 변함없이 성탄절을 맞이합니다. 예수님의 태어나심이 비상계엄령의 칙령으로 불쾌함을 겪고 있는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아기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다는 소식을 처음 들은 것은 베들레헴 인근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이었습니다. 당시 목자는 그다지 좋은 직업이 아니었습니다. 방탕하고 부정직하며 종종 불법적으로 양들을 방목한다고 비난받았습니다. 아마도 그래서 목자들은 밤에 양들을 방목하고 있었을 것입니다.(눅 2:8) 쉽게 말해 목자들은 당시 주변부의 별 볼 일 없는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천사는 목자들을 찾아가서 아기 예수님의 태어나심을 노래합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 중에 평화로다.”(눅 2:14) 천사의 찬송은 묘한 대조를 일으킵니다. 로마 권력자의 칙령과 강요된 평화가 아닌 작고 연약한 아기의 탄생으로 인한 하나님의 평화를 노래합니다.

목자들은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고, 서둘러 베들레헴으로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만납니다. 천사가 자신들에게 들려준 이야기를 전합니다. 로마의 칙령과 강요된 평화에 불편함과 어지러움을 겪던 모든 사람은 놀랍니다. 마리아는 목자들이 말한 것들을 마음속 깊이 오래 간직했습니다. 목자들은 자기들이 듣고 본 모든 일이 사실임을 알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찬송합니다.

세상의 칙령은 계속됩니다. 죽음의 사슬이 우리를 조여 오기도 합니다. 강요된 평화에 만족하라는 협박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성탄을 맞이하는 우리는 밤의 어둠 속에서 하나님을 봅니다. 별 볼 일 없는 주변인으로 살아간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기대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되새기고, 하나님의 평화를 기뻐합니다. 그리하여 믿음의 사람들은 칙령에서 해방되고 하나님의 평화를 찬송합니다. 칙령은 찬송하는 사람을 이길 수 없고 계엄령은 응원봉을 이길 수 없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메리 크리스마스.

(안산제일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