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온 다음 날이면 녹진한 향이 사방에서 진동했다.”
“고향의 향기를 생각하면 할머니 집 다락방이 떠오른다. (중략) 달짝지근했던 청매실향.”
전시장에 문장의 장막이 무수히 쳐졌다. 빼곡하게 적힌 문장들을 읽다보면 기억 속 고향의 냄새가 소환된다.
올해 이탈리아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에서 선보인 ‘구정아-오도라마 시티’가 서울 종로구 대학로 아르코미술관에서 귀국보고전을 지난 20일부터 시작했다. 이번 한국관은 개관 이래 첫 공동 예술 감독 체제를 가동했다. 2020년 부산비엔날레에서 감독과 큐레이터로 호흡을 맞췄던 덴마크 출신 야콥 파브리시우스와 이설희씨가 공동 감독이 됐다.
구정아 작가를 초대한 이번 한국관 전시는 냄새로 한반도의 초상화를 구현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작가와 두 감독은 ‘한국의 도시, 고향에 얽힌 향의 기억’을 전 세계인으로부터 수집했다. 입양인, 이민자, 탈북자 등 한국인(계)으로만 한정하지 않고 북한을 방문한 외국인, 서울외신클럽 외국인 기자 등 범위를 확장했다. 이번 작업은 ‘모든 곳에서 살고 일하는’ 삶을 실천하는 구 작가의 작업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향’ 작업의 연장선에 있다.
그런데 전시 내용은 같지만 베니스와 서울의 전시 공간 구성이 다른 만큼 전시 방식도 달라진다.
베니스에서는 텅 빈 공간에 작가의 아바타 같은 조각 ‘우스’가 좌대 위에 설치돼 코를 통해 냄새를 뿜었다. 그러니 그곳에서는 조향사들이 만든 냄새를 통해 향에 얽힌 스토리를 상상해야 했다.
이번에는 수집한 스토리 600여편을 프린트해서 관객들이 읽을 수 있도록 장막처럼 내걸었다. 베니스에서는 홈페이지를 통해서만 읽을 수 있었다. 현장에서 무수한 문장을 읽는 순간 잊고 있었던 냄새에 대한 기억을 환기하게 된다. 또다른 층에서는 조향사들이 조제한 냄새가 그윽하게 퍼져 있다. 16명의 조향사들은 사연과 키워드를 듣고 17개의 다른 향을 개발했다. 예컨대 프랑스 파리의 델핀 르보는 햇빛의 향기, 오래된 한옥, 밥 짓는 냄새, 살구꽃 냄새, 호박잎 냄새 등을 구현하려 애썼다고 썼다. 전시는 내년 3월 23일까지.
손영옥 미술전문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