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 탄핵 무렵 ‘순실증’이란 말이 회자했다. 국정농단 주범 최순실(최서원)씨 행태가 하나둘 드러나고, 그에게 조아린 재벌의 모습과 뜯어낸 자금 규모가 밝혀지면서 많은 국민이 박탈감과 무력감을 겪었다. 이는 특정 사건에 사회 구성원이 비슷한 상실감을 느끼는 ‘집단 우울’ 현상을 낳았는데, 그 우울증에 원인 제공자 이름을 붙인 자조적 조어였다.
수천만 국민이 비슷한 감정을 느끼는 이례적 상황을 우리는 자주 경험했다. 멀게는 군사독재 시절의 강압 통치가 그런 분위기를 강요했고, 민주화에 들뜬 지 얼마 안 돼 외환위기가 터지면서 방송사 책임자들이 모여 쇼 프로그램 축소에 합의할 만큼 짙은 우울감이 사회를 짓눌렀다. 집단 우울의 대표적 기억은 세월호였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조사에서 매년 6점대를 유지하던 성인 우울지수는 그 참사가 발생한 2014년 8.7점으로 치솟으며 ‘트라우마’란 용어를 각인시켰다.
문재인정부 시절에는 우울감이 안팎에서 찾아왔다. 감춰졌던 불공정이 조국 사태로 드러나 박탈감을 주더니, 팬데믹이 길어지며 코로나 블루를 낳았고, 집값 폭등에 절망감을 공유한 이들이 ‘영끌’에 나섰다. 그런 지 몇 년 만에 지금 다시 겪고 있는 이 집단 감정은 ‘계엄 우울증’이라 불러야 할 것이다. 선진국이 된 줄 알았는데, 한순간에 경제도 안보도 나라의 위상도 위태로워졌다. 황당한 사태에 생각할수록 기가 차고, 따져볼수록 답답하며, 출구 없는 터널처럼 암담한 감정의 그늘이 짙게 드리웠다.
돌이켜보면, 자주 반복된 집단 우울을 우리는 원인을 제거하고 책임을 물으며 꾸역꾸역 이겨내 왔다. 민주화로 독재를 종식하고 주동자를 처벌했듯이. 세월호의 책임을 치열하게 따진 것도, 조국을 기어이 감옥에 보낸 것도 집단적 상처의 치유와 무관치 않았다. 8년 전 순실증도 그리 대처해 책임을 물었지만, 원인까지 제거하진 못했다. 제왕적 대통령제의 치명적 허점을 놔둔 채 지나왔더니 다시 계엄 우울증에 시달리게 됐다. 이번엔 이 아픈 감정을 초래한 시스템을 확 뒤엎어야 한다.
태원준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