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자들 실력 가늠조차 못하는데
등급·표준점수 등 파악해야 하고
의대 증원·n수생·무전공 확대 등
변수까지 따지기는 사실상 불가능
여유 있는 부모 둔 수험생만 유리
등급·표준점수 등 파악해야 하고
의대 증원·n수생·무전공 확대 등
변수까지 따지기는 사실상 불가능
여유 있는 부모 둔 수험생만 유리
‘수험생 여러분 수고 많았어요.’
대학수학능력시험이 끝나면 온 사회가 수험생의 노고를 위로합니다. 함께 고생한 학부모와 선생님들도 서로 등을 토닥이며 훈훈한 분위기가 이어집니다. 하지만 가장 기대감에 부푼 이들은 사교육 컨설팅업체일 겁니다. 교육부 관료들과 정치인들이 제도적으로 보장해주고 있는 ‘대목’이 다시 시작되는 시기이니까요.
가채점만으로 뭘 어쩌라고…
수능 직후 수험생들이 겪는 과정을 보면, 현행 대입 제도가 수험생에게 얼마나 가혹하게 설계돼 있는지, 사교육 컨설팅업체들에는 얼마나 큰 혜택을 제공하고 있는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수능을 마치고 나온 수험생이 가장 먼저 할 일은 가채점입니다. 수험표 뒷면에 적어 왔거나 그렇지 못했으면 기억을 더듬어 채점해야 합니다. 자기가 맞힌 문항에 할당된 배점을 합산해 원점수를 산출하는 과정입니다.
원점수는 그 자체로는 대입에서 쓸모가 없습니다. 수능은 철저히 줄을 세우는 상대평가입니다. 상대적 위치, 즉 서열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가채점을 통해 나온 원점수를 갖고 상대적 위치를 보여주는 지표인 등급과 표준점수, 백분위 점수를 파악해야 합니다. 수험생들이 직면하는 첫 번째 불확실성입니다.
말이 안 되는 요구입니다. 수험생들은 함께 수능을 치른 경쟁자들의 실력을 가늠할 방법이 없습니다. n수생이 30%가량 유입되는 상황에선 더 말할 것도 없지요. 방대한 데이터와 분석 노하우를 축적해놓은 사교육 컨설팅도 틀리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래도 추정치라도 가진 사교육에 기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없으니까요.
‘수시 납치’ 누구를 위한 함정인가
다음 단계는 더욱 가혹합니다. 수시 원서를 제출했던 대학이 시행하는 대학별고사를 볼지 말지 결정해야 하죠. 판단 기준은 ‘가채점 결과로 예상되는 정시 합격 가능 대학’입니다. 수능 성적이 예상보다 좋게 나올 거로 판단된다면 대학별고사 ‘노쇼’(no-show)를 통해 합격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해야 합니다.
수시에 원서를 냈던 대학에 덜컥 합격해버리면 정시 지원 기회가 박탈되는 이른바 ‘수시 납치’ 때문입니다. 서울대에 갈 성적이 나왔는데 ‘인(in)서울’에 만족하는 수험생은 없을 겁니다. 억지로 들어간 대학에서 학업에 집중하기도 쉽지 않을 겁니다. 수시 납치 피해 학생은 땅을 치며 재수를 고민하기도 합니다.
반대로 수능 성적이 예상보다 저조해 수시 원서를 냈던 대학의 수능 최저학력기준을 맞출 수 없다면 굳이 숨 가쁘게 돌아가는 입시 일정 속에서 대학별고사에 참여해 힘을 뺄 이유가 없습니다.
수능 직후 사교육 컨설팅업체들은 수험생에게 이렇게 조언합니다. ‘가채점은 되도록 빠르고 정확하게 그리고 보수적으로 마무리하세요. 등급, 표준점수, 백분위를 추정했으면 가장 먼저 할 일은 정시 합격 가능 대학을 추려내는 일입니다. 전년도 입시 결과와 대학마다 천차만별인 수능 반영 방식, 전년도와 달라진 점 등을 꼼꼼히 살펴보고 판단하세요. 올해는 의대와 무전공, n수생, 문과침공 등 변수들로 합격선이 출렁일 수 있으니 유의하세요. 전년도 결과는 참고만 하시길 권합니다.’
애석하게도 틀린 말이 하나 없습니다. 현행 대입 제도하에서 수능 직후 수험생이 해야 할 일과 유의사항을 나열했을 뿐입니다. 이렇게 점잖게 조언하는 것만으로도 학부모 지갑을 여는 데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도대체 수험생들이 어떻게 의대 증원과 n수생 유입 변수, 무전공 확대란 변수를 고려해 정시 합격선을 예측할 수 있겠습니까. 컨설팅을 받으러 오라는 말입니다.
제도적 불확실성이 만든 불공정 게임
정시 합격선을 정교하게 예측하려면 많은 변수를 고려해야 합니다. 수능을 100% 반영하는 곳도 있고 면접이나 학생부를 가미하는 곳도 있습니다. 대학마다 전공별로 국어와 수학, 영어, 탐구의 반영 비율과 방식이 전부 다릅니다. 탐구 영역의 난이도 차이를 고려해 대학별로 개별적으로 산출해 정시에서 활용하는 ‘변환표준점수’는 수능 성적표가 나오는 12월 초에야 확정됩니다.
정교하게 하려면 끝이 없죠. 금전적 여유가 있는 학부모를 둔 수험생일수록 고액의 컨설팅을 반복해 예측 정확도를 높일 수 있습니다. 예측 정확도가 높을수록 입시 전략은 정교해지고 원하는 대학에 들어갈 가능성은 커집니다. 공정한 게임이 아니죠.
촉박한 데드라인도 수험생을 사교육 컨설팅으로 몰아넣습니다. ‘가채점→정시 합격 가능 대학 파악→대학별고사 참여 결정’ 과정에 주어진 시간은 단 하루입니다. 수능은 목요일 치르는데 대다수 대학은 이틀 뒤인 토요일부터 대학별고사를 본격화하죠. 인생의 경로가 달라질 수 있는 결정을 내려야 하는데 온통 불확실성 투성이입니다. 수능 치르고 나온 수험생들에게 더 적합한 말은 “이제부터 더 매운 맛이니 각오 단단히 하세요”, 학부모에게는 “이제 컨설팅에 지갑 열 시간입니다”일지도 모릅니다.
마지막 3회에서는 이처럼 학생과 학부모를 사교육으로 몰아넣는 제도를 만들어놓은 장본인들이 사교육 컨설팅의 ‘불안 마케팅’, 학부모들의 무지 등을 탓하며 팔짱 끼고 있는 현실을 짚어보겠습니다. 현행 대입 제도의 틀 안에서 불확실성을 줄일 수 있는 방안을 제안해보려고 합니다.
이도경 교육전문기자 yid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