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말하셨지, 인생을 즐겨라. 웃으면서 사는 인생. 자 시작이다.’ 2000년대 초 한 금융사 TV 광고 삽입곡의 노랫말이다. 중독성 있는 쉬운 멜로디와 유쾌한 가사로 국민적 사랑을 받았는데, 재치 있는 개사로 패러디하는 것도 유행했고 ‘W송’이라는 정식 음원을 발매하는 수준이었다. 불현듯 이 노래를 떠올리게 된 건 아버지의 배웅을 받으며 주고받은 짧은 대화 때문이다. 어두컴컴한 골목을 나란히 걸어 나오는데 밤하늘에 손톱달이 정면으로 떠 있었다. 나는 달이 참 아름답다고 중얼거렸다. 이내 말없이 걷던 아버지의 나직한 음성이 귓가에 닿았다. “세상은 다 아름답지.”
그럴 리가. 아버지의 세상이 마냥 아름답기만 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미간을 찌푸리게 하고 깊은 한숨을 쉬게 하고 마음에 생채기를 내는 고단한 날들을 당신도 피해 가지 못했으니. 오랜 나날 가장의 무게를 짊어진 채로 세상 풍파를 견뎌오면서 검은 머리카락이 하얗게 세고, 굳은살 박인 손마디가 자주 저리고, 심신이 고돼 이르게 잠드는 날이 많다는 걸 안다. 그렇지만 여전히 자식에게 아름다운 세상만 전해주고 싶은 것이다. 볼썽사나운 것에 시선을 뺏기지 말고 곱고 귀중한 것들과 정을 나누었으면 하는 것이다. 인생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에는 가치와 의미가 있으니 너른 마음으로 내 세상을 아름답게 가꾸었으면 하는 것이다.
그 마음은 쏟아지는 졸음을 하품과 함께 뱉어내고 동화책을 읽어주던 때와 같았다. 돌이켜보니 좋은 것만 들려주고 보여주고 싶은 아버지의 사랑은 늘 한결같았다. 출생신고서에 적힌 이름 석 자와 튼튼하게 자란 뼈와 살과 피, 짤막한 편지와 용돈, 먼지 쌓인 가족 앨범 속에 그 사랑이 담뿍 담겨 있다. 한때는 내 작은 세상의 든든한 울타리였고 이제는 어깨를 다독이며 응원하는 사람, 아버지가 건넨 말 한마디가 잊히지 않는 노랫말처럼 마음속을 유영한다. “세상은 다 아름답지.”
함혜주 이리히 스튜디오 대표